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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과학의 눈부신 발달이 새로운 사회윤리를 요구하고 있다. 바야흐로 인간 유전체(genome)가 거의 그 전모를 드러냈고, 양에서 출발한 체세포 복제가 급기야 원숭이에 이르렀다. 인간 유전체의 염기서열을 밝힌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과학적 개가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 유전체에서 어느 유전자가 어디에 앉아 있느냐는 배치도를 그린 것에 불과하다. 왜 그 유전자가 그곳에 있게 되었는지, 무슨 일에 관여하는지 등을 밝히려면 앞으로도 몇 십 또는 몇 백 년이 더 걸릴 것이다.

          요즘 우리 사회는 인간 배아 연구를 허용할 것인가, 허용한다면 어디까지 할 것인가를 놓고 뜨거운 논란을 거듭한 끝에 급기야 2001 5, 과학기술부 생명윤리자문위원회가 생명윤리기본법(가칭) 기본 골격안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면서 생명과학의 발전을 꾀해야 한다는 두 마리 토끼를 쫓아야 하는 어려움을 안고 있었던 이 법안이 배아 복제 연구를 사실상 원천적으로 금지함으로써 논란이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이 논란의 한가운데에는 수정 후 14일 기존이라는 웃지 못 할 쟁점이 있다. 수정이 된 지 14일을 전후하여 인간 배아는 이른바 원시선(primitive streak)이라는 형태를 갖추는데, 이곳으로부터 모든 기관들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그 이전의 세포덩어리와는 구별해야 한다는 주장과 수정란부터 생명을 지닌 인간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그러나 14일 기준에 과학적인 객관성을 부여하기는 사실 어렵다. 14일이란 시각도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를 수 있고 기관이 만들어지는 시각이 가져야 할 중요성이 그리 특별날 이유도 따로 없다. 수정란을 생명체로 간주하는 견해는 더욱 큰 문제를 안고 있다. 이번에 발표된 생명윤리기본법은 구정이 되는 순간부터 인간의 생명이 시작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수정란에 생명을 부여한다는 것은 수정란도 성체와 똑같이 보호해야 한다는 윤리적 당위성을 수반하기 때문에 그 과급 영향이 자뭇 크다.

          이 같은 결정에는 과학적으로 피할 수 없는 모순이 도사리고 있다. 인간의 경우 임신의 거의 80%가 이런저런 이유로 산모의 몸 속에서 자연 유산이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렇다면 여성들의 절대 다수는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생명체를 죽이는 살인자가 되는 셈이다. 수정란이나 초기 배아를 중시하자는 의견들은 다 생명 경시 풍조를 지적하는데, 비록 모르고 저지르는 일이기는 하지만 엄연한 살인이 되는 걸 어찌하랴. 그것도 자기 자식의 생명을 죽이는 일인데.

          새들을 비롯한 지구 상의 거의 모든 동물들은 수정란을 몸속에 품지 않는다. 물고기나 개구리들은 아예 수정도 몸 밖에서 하지만 체내 수정을 하는 새들도 수정이 되기 무섭게 알을 몸 밖으로 내놓는다. 둥지에 놓여 있는 알을 과연 생명체로 봐야 할 것인가. 그렇다면 오리 알을 날것으로 들이마실 때 한 생명체를 통째로 그것도 산 채로 삼키는 셈이 된다.


생명, 생명체 그리고 유전자

          ‘생명의 시작을 얘기하려면 어쩔 수 없이 유전자로 환원할 수밖에 없다. 어차피 생명체란 유전자가 더 많은 유전자를 만들기 위해 만들어낸 매개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생명체란 유전자의 정보에 따라 만들어져 이 세상에 태어나 일정한 시간을 보내곤 허무하게 사라지는 존재이지만 유전자는 시대를 거듭하며 살아남는다. 생명의 역사는 한마디로 DNA라는 기막히게 성공적인 화학물질의 일대기에 지나지 않는다. 생명은 이처럼 한 생명체의 탄생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태초부터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온 DNA의 표현일 뿐이다.

          그렇다면 생명체의 시작은 과연 어디인가. 생명체, 즉 스스로 숨 쉬고 번식하는 독립적인 실체의 시작 말이다. 일란성 쌍둥이의 경우에는 하나의 수정란이 포도송이와 같은 세포덩어리가 되었다가 무슨 이유에선지 둘로 갈린 후 완벽하게 정상적인 두 개체로 성장한다. 하나의 수저안이 세포덩어리가 되기 이전의 그들을 과연 두 생명체로 봐야 할 지 아니면 아직은 하나의 생명체로 봐야 할지 참 애매한 일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배아는 완전한 생명체로 보기 어렵다.

          배아는 유전자가 생명체를 만들어내는 중간 과정일 뿐이다. 다시 말하면 유전자가 생명 현상을 독립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을 만들어주고 그 몸이 의식을 얻어야 비로소 하나의 생명체가 탄생한다고 봐야 한다. 인간은 특별히 완전하지 않은 신경계를 가지고 태어나는 동물이다. 그래서 만일 신경계가 자의식을 확립하여 하나의 완벽한 양혼으로 거듭나는 시기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면, 어머니의 몸을 빠져나와서도 한참이 지난 후이다.

          이처럼 생명체의 시작을 논한다는 것은 공허한 일이다. 생명은 연속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생명의 시작은 DNA의 탄생과 때를 같이한다. 그 태초의 바다에 떠다니던 많은 화학 물질들 중에 어느 날 우연하게도 자기 자신을 복제할 줄 아는 묘한 화학물질인 DNA가 나타나 지금에 이르기까지 수십억 년 동안 다양한 들을 만들며 살아온 것이 바로 생명의 역사다. 지금은 비록 인간의 몸속에, 그리고 개미와 은행나무의 몸속에 들어앉아 있지만, 그 모든 DNA는 전부 하나의 조상 DNA로부터 분화한 자손들이다.

          이런 점에서 생명이란 하나의 생명체의 관점에서 볼 때 분명히 한계성(ephemerality)을 지니지만, DNA의 눈으로 보면 태초부터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온 영속성(perpetuity)을 지닌다. 무성생식을 하는 생물들의 경우에는 DNA가 복제된 후 몸이 갈라지기만 하면 번식이 이뤄지지만, 유성생식을 하는 생물들은 자신의 DNA의 절반을 운반하는 남자의 정자를 만들고 그들이 서로 만나야 비로서 수정란이 된다. 난자와 정자도 생명은 생명체에서 생명체로 이어진다. 난자와 정자는 연결고리에 불과하다. 생명은 계속 이어지고 있으나 생명체는 잠시 단절된다.

          수정란을 완벽한 생명체로 볼 수없다고 해서 그들을 마구 다뤄도 괜찮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배야 복제 실험을 마친 후 그 배아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결코 가볍게 다룰 수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세계 각처에서 벌어지는 낙태 시술의 현장을 재현해서는 절대 안 된다. 우리 모두 이마를 맞대고 이런 모든 순간에서 절대로 생명의 존엄성이 훼손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다만 생명체의 시작을 논한다는 것이 공헌한 일이며 그 공허하고 모호한 기준에 따라 생명과학자들의 연구 활동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일은 더욱 불합리히다.

          수정란의 생명을 절대로 인정해선 안 된다는 논리도 성립할 수 없다. 지나치게 인간 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자연계를 두루 둘러보면 수정란을 하나의 완벽한 생명체로 보기 어려울 뿐이다. , 인간이 자의식을 얻어야만 비로소 생명체로 인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의식과 자의식 간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인간을 제외한 다른 동물들에게 자의식을 부여하기는 힘들지만 그들에게 의식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억지로 생명체의 시작을 논해야 한다면 유전자가 만들어준 몸이 독립적인 의식을 확보할 때로 보는 것이 수저안으로 보는 것보다 덜 비합리적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복제 인간과 함께 사는 세상

          밤새 눈이 엄청나게 많이 내려 이웃 사람들이 미끄러지기 전에 집 앞을 치워야겠다는 생각에 밖에 나와 보니, 이미 말끔하게 치워져 있었다. 알고 보니 옆집에 새로 이사 온 젊은 부부가 치웠다고 한다. 자기 집 앞도 치우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 요즘 같은 세상에 참 보기 드물게 예의 바른 부부란 생각에 흐뭇했다. 이웃을 잘 만난다는 것만큼 큰 행복도 별로 없지 않은가.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그 부부가 복제 인간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하자. “어쩐지 어딘가 수상쩍다 싶었다니까할 것인가. 아니면 복제되었으면 어때, 사람만 성실하고 좋으면 됐지라고 할 것인가?

          섬뜩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리 먼 훗날의 얘기가 아니다. 지난 세기말 영국의   윌머트(Ian Wilmut) 박사가 복제양을 만든 것을 시작으로 세계는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인간 복제를 향한 발걸음을 재촉해왔다. 우리는 바야흐로 우리 자신을 복제할 수 있는 시대에 살게 되었다. 기술적으로는 더 이상 큰 어려움이 없다, 그래서인지 종교계는 신성(神聖)을 훼손하는 일이라며 엄청나게 술렁이고 있다. 과학이 우리 삶의 질을 향상시킨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적으나, 왠지 점점 더 거대한 공포의 대상으로 우리를 몰아넣고 있다는 느낌 역시 지울 수 없다.

          그러나 과학에 대한 좀 더 명확한 이해가 필요할 것 같다. 사람들은 마치 금방이라도 히틀러나 무솔리니 같은 이들이 여기저기에서 나타나 온 세상을 쑥밭으로 만들기라도 할 것처럼 호들갑이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은 어디까지나 유전자 복제이지 결코 생명체 복제가 아니다. 아무리 칭기즈칸을 복제한다 하더라도 그가 칭기즈칸으로 성장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위대한 정복자가 될 약간의 포악한 성격은 타고날지 모르나, 세상이 완전히 딴판으로 바뀐 현대에 그가 제2의 칭기즈칸이 될 확률은 거의 영에 가깝다. 테레사 수녀를 여럿 복제한다 해도 그들이 모두 남을 위해 평생을 바치지는 않을 것이다.

          복제 인간은 출산 시간이 좀 많이 벌어진 쌍둥이에 불과하다. 나는 쌍둥이로 태어나지 않았지만, 내가 만일 지금 나를 복제한다면 무슨 이유에선지 어머니의 뱃속에서 몇 십년을 더 있다가 쌍둥이 동생이 뒤늦게 태어난 것뿐이다. 몇 초 간격으로 태어난 쌍둥이 형제들도 결코 똑 같은 사람으로 자라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늦둥이 쌍둥이 동생이나와 완벽하게 같을지라도 그 유전자들이 발현되는 환경이 나와 다르기 때문에 전혀 다른 인간으로 성장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에 쌍둥이들이 좀 많아진다는 것이 그렇게도 끔찍한 일인가? 유전자 복제보다 우리가 더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것은 유전자 조작의 문제이다. 복제 인간은 한 두 번 만들어보다 시들해질 가능성이 크지만, 유전자 조작은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마구 뻗어나갈 것이다. 복제양이 만들어진 이후 미국에서는 누구를 복제하고 싶으냐는 여론 조사가 있었다. 마이클 조던과 레이건 대통령을 비롯한 저명인가와 인기인들의 이름들이 거론되었다. 우승을 갈망하는 어는 농구 구단주가 마이클 조던을 복제하여 운동장에 내놓을지는 모르지만, 그런 일이 얼마나 많이 벌어지겠는가? 부족한 노동력을 충당하기 위해서나 세상을 무력으로 정복하려는 계획을 세운다면 모를까 대규모로 복제 인간들을 생산할 이유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유전자 조작의 매력은 복제 인간에 대한 기대에 비할 바가 아니다. 유전자의 기능들이 속속 발겨지고 내가 가진 결함들이 어떤 유전자에 의해 발생하는 것인지를 알게 될 때, 그 유전자를 보다 훌륭한 유전자로 바꾸고 싶은 욕망이 왜 일지 않겠는가, 노화의 비밀이 밝혀져 다만 몇 개의 유전자만 바꾸면 몇 십 년을 더 살 수 있게 된다면 누군들 마다 하겠는가.

          얼마 전 미국에서는 불치의 병을 앓고 있는 첫째 아이에게 골수를 이식해줄 수 있는 사람을 찾다가 실패하자 현대 유전학의 힘을 빌려 계획적으로 건강한 둘째 아이를 임신한 어느 부부의 행동에 대해 뜨거운 논란이 있었다.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옛말처럼 죽어가는 자식을 살리기 위해 과학에 기댔기로 누가 과연 그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단 말인가. 생각하기조차 끔찍한 일이지만 내가 만일 그런 상황에 놓인다면 나는 두 번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영혼은 복제되지 않는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생명체는 누구나 한계성 생명을 지닌다. 최소한 지구에서 사는 생명체는 모두 그렇다. 그래서 종교에서는 대체로 우리의 생명은 한계성을 지니지만, 믿음과 의식을 통해 영원불멸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기독교와 천주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가 우리를 창조하신 영원불멸의 존재를 믿고 그를 거역하여 지은 원죄를 인정하면 내세이 이르러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불교에서는 생명이 한계성을 지니되 그것을 담아줄 그릇, 죽 육체를 바꿔가며 윤회한다고 가르친다. 생명체를 일시적 집합체로 보는 불교의 무아설(無我說)DNA가 하나의 생명체를 만들었다가 해체시키곤 또 만들고 하는 잔화의 기본 원리와 흡사하다. 한계성을 전제로 한 생명의 개념이지만, 영생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생명이 한계성을 지닌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체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의 얘기다. 생명체는 누구나 어김없이 죽을 수 밖에 없지만, 그의 형질들은 유전자를 통해 길이 자손 대대로 전달될 수 있다. 그래서 『이기적인 유전자』(The Selfish Gene)의 저자인 옥스퍼드 대학 진화생물학자 도킨스(Richard Dawkins)는 유전자, DNA불멸의 나선(immortal coil)’에 불과하다고 했다. 하버드 대학 생물학자 윌슨(Edward Wilson)도 이 관계를 낡은 달걀이 더 많은 달걀을 얻기 위해 잠시 만들어낸 매체에 불과하다라고 비유했다. 개체의 관점에서 본 생명은 한계성을 지니지만, 유전자의 눈높이에서 바라본 생명은 영속성을 지닌다.

          DNA의 기본 구조는 현재까지 확인된 모든 생명체에서 동일하다. 다윈이 주장한 대로 오늘날 이처럼 다양한 지구 상의 모든 생물들은 모두 태초에 우연히 생성된 그 어느 성공적인 복제자 하나로부터 분화되어 나왔기 때무이다. 비록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에는 제가끔 보다 효율적인 복제를 위하여 다른 생존 기계들 안에 들어앉아 있지만,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모두 하나의 조상을 모시는 한 집안 식구들이다. 이처럼 생명은 무수히 많은 가지를 뻗었으나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연속성(continuity)을 지닌다.

          지금까지 늘 그래왔듯이 DNA는 어떤 방법으로든 계속 복제의 길을 걸을 것이다. 그러나 영혼은 절대 복제되지 않는다. 자연과학자인 나는 영혼도 결국 물질의 표현일 수밖에 없다고 믿는다. 그러나 같은 DNA를 지녔다고 영혼도 똑같아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한 사람의 영혼이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DNA 위에 세상을 살며 터득한 온갖 지식들이 한데 어울려 엮어진 산물이기 때문이다. 인간 복제가 현실로 우리 앞에 설 것은 기정사실이다. 무지에 바탕을 둔 두려움을 앞세울 것이 아니라 열린 마음으로 대처해야 한다. 복제된 인간과 그렇지 않은 인간들 간의 화합과 평등을 걱정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학제 연구의 필요성

          어떤 형태로든 유전자 조작 기술이 우생학적으로 사용되는 것은 막아야 한다. 아시아가 낳은 가장 위대한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는 싱가포르의 전 수상 리콴유도 한 때 엄청난 실수를 범할 뻔한 일이 있었다. 좁은 나라에서 모두가 자식들을 낳아 기르면 안 된다는 조급한 마음에 지능과 능력이 월등한 사람들만 자식을 가질 수 있게 하자는 법령을 만들려다 국민들의 거센 반발에 서둘러 철회하고 말았다. 조작 기술이 인간을 차별하는 도구로 전락하면 그것이 바로 우리의 존엄성을 해치는 일이다.

          시간문제일 뿐 유전자 조작을 비롯한 인간 복제 전반에 관한 실험이 어떤 형태로든 일어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인위적으로 규제한다고 영원히 막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구더기가 무섭다고 판도라의 상자를 닫아둘 수는 없다. 인간 유전자의 호기심이 절대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막는다고 해서 세계가 함께 참아줄 것도 아니다. 결국은 어느 나라에선가 하게 되고 지나치게 소극적인 정책을 편 우리나라는 그런 나라들로부터 정보를 사들어야 하게 된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되 조심스럽게 열 수 있도록 생명과학자들을 도울 일이다.

          과학자들의 연구는 충분히 보장해야 한다. 구더기가 무서워 장 담그기를 멈출 수는 없다. 다만 그러한 지식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심각하게 논의해야 한다. 과학자라고 해서 책임을 회피할 수는 없다. 현대의 과학자들은 더 이상 노벨이 걸었던 길을 걸을 수 없다. 현대 과학이 자칫하여 저지를 수 있는 사고는 더 이상 다이너마이트에 비할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생명과학의 자기반성과 성찰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과학자들 스스로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가이드라인을 세워야 한다. 다른 모든 일이 다 그렇듯이, 자율 규제가 지나친 외부의 간섭을 막는 제일 좋은 방법이다.

          생명과학 분야의 거의 모든 정보가 미국의 손아귀로 흘러들고 있다. 복제양은 영국이 처음 만들어냈지만 특허권은 미국의 손에 들어가버렸다. 미국은 현재 자체적으로 가장 활발한 연구를 하고 있는 것은 물론 다른 나라에서 개발 된 기술과 지식도 모두 사들이고 있다. 이대로 가면 전세계가 생명과학 지식에 관한 한 미국의 속국이 될 날이 멀지 않았다. 원천적으로 봉쇄할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연구에 참여해야 한다. 생명과학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합당한 윤리 규범을 만들도록 시간을 줘야 한다. 아직 족쇄를 채울 대가 아니다. 인문사회학자들과 생명과학자들의 학제적 공동 연구가 절실하다.

          인간 유전체 연구 결과가 발표되기 얼마 전, 당시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블레어 영국 총리가 공동 기자회견을 갖고 인간 유전체 정보는 세계가 함께 공유해야 한다고 주장하 바 있다. 그렇게 엄청난 예산을 쏟아 부으며 추진해온 사업인데 갑자기 자선 사업을 하겠다니 선뜻 이해가 가지 않은 행동이었다. 그 두 정치인이 그런 주장을 하게 된 배후에는 엄청난 재원을 투자하여 시작한 사업이 자칫하면 일개 유전공학 회사에 뒤지고 말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나라 같은 유전 정보 후진국들은 그들의 발언에 책임을 물을 필요가 있다. 생명과학 정보와 기술은 발전하는 것이지 발명하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과학적 발견에 특허를 준다는 것은 어딘가 모순이 있어 보인다. 나 역시 중미 열대 지방에서 알려지지 않았던 곤충을 찾아내 신종으로 발표한 적이 있지만, 그 종에 대한 특허를 내지는 않았다. 인간은 물론 다른 모든 생명체 안의 유전자에 관한 정보들에 선진국들이 특허를 내며 독점하는 행위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 인문사회과학자들의 도움이 절실하다. 우물 안 개구리들처럼 누구는 뛰려 하고 누구는 발목을 잡으려 할 것이 아니라 함께 가장 실리적이고 합리적인 길을 모색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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