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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다홍빛하늘입니다:) 모든 스포츠에는 경기를 할 때 마다 기록이 남겨지고, 그 기록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선수들을 기억합니다. 야구도 예외는 아닙니다. 다승 하면 사이 영, 탈삼진 하면 놀란 라이언 등 많은 선수들을 기억하고 추억해냅니다. 하지만, 별 다른 기록을 남기지 못했더라도 딱 하나의 찬란한 기억으로 인해 기억되는 선수들도 존재합니다. 그러한 의미로, 이번 포스팅에는 KBO 리그에서 노히트 노런을 달성한 선수들(외국인 제외)에 대해 살펴보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1. 방수원(해태, 198455, 포수: 유승안)

 

KBO 리그의 첫 노히트 노런의 영광은 방수원 선수에게 돌아갔습니다. 박철순, 최동원 등 초기 프로야구를 평정했던 투수들이 아니라는 점에 약간은 의아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선발보다는 중계투수 역할, 땜빵 선발 등 마당쇠 역할로 팀에 공헌했던 선수입니다. 그는 프로야구 첫 시즌이었던 1982년 부상당한 선발투수를 대신하여 154이닝과 6승으로 선전했으나 다음시즌 선발투수인 이상윤이 로테이션을 채우기 시작하면서, 그는 은퇴할 때 까지 정해진 보직 없이 등판하게 됩니다.

KBO 리그 최초 노히트노런이 나온 그 날에도, 방수원 선수는 선발진에 구멍인 생긴 까닭에 임시로 등판하게 되었습니다. 그때까지 그는 한 차례의 승리도 거두지 못 한 터라, 감독도, 선수도 모두 2~3이닝만 어떻게든 막기를 기대했습니다. 방수원 선수에게 선발 투수를 맡긴 건 시즌 중 얼마 없는 일이었고, 혹여나 실점이나 안타 하나면 교체될 수 있다는 생각에 구위로 상대방을 누르는 대신 최대한 맞춰 잡는 투구를 선보였습니다. 그렇게 6, 7, 8회가 지나고, 9회가 되자 관객석과 덕아웃에 수많은 대화가 오고갔습니다. 과연 여기서 KBO 리그 최초의 노히트노런이 세워질 것인지, 그리고 그 주인공이 방수원 선수가 맞는지에 대해서였습니다. 그리고 9,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삼진으로 잡으면서 그는 삼미 슈퍼스타즈를 상대로 9이닝 동안 6삼진, 3사사구, 무피안타로 KBO 최초로 노히트노런 기록을 달성합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그의 야구선수로의 삶은 순탄치 못했습니다. 1984년 그의 기록에는 단 1승만이 적혀져 있었고(노히트 노런으로서 기록한 1승이 시즌의 유일한 승리였습니다), 그 후에도 여전히 마당쇠 역할을 수행하다가 1989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합니다. 비록 원년 시즌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선발 로테이션을 채운 적이 없었고, 당시에는 선발투수에서 밀려나면 중계투수로 뛴다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에 시즌 중 그의 능력을 온전히 평가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구위가 좋지 않은 직구 대신 커브, 슬라이더, 체인지업 등 다양한 변화구를 사용했고, ‘무등산 폭격기선동열이 고등학교 시절 5.18 민주화 운동 당시 인연을 맺어 그에게 슬라이더를 처음 가르쳐 주기도 했습니다. 선발 로테이션에 들지 못하고 보직 없이 팀을 위해 던졌던 그 때, 야구를 포기할 수도 있었지만 이를 극복하고 묵묵히 희생한 것이 아마 KBO 리그 최초 노히트노런이라는 선물을 그에게 준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2. 김정행(롯데, 198665, 포수: 한문연, 김용운)

1982, 우리나라가 첫 프로야구 시즌을 보낼 때, 1936년 만들어진 일본 프로야구는 벌써 47년째 시즌을 맞이하고 있었고, 그만큼 실력 차가 컸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KBO에서는 재일동포에 한하여 일본에서 활약했으나 밀려난 프로야구 선수들을 영입하기로 합니다. 유일무이한 시즌 30승과 400이닝을 기록한 너구리장명부, 김시진과 듀오를 이루며 활약했던 황금박쥐김일융 등 많은 재일교포 선수들이 KBO 리그에서 활약했습니다. 그 중에는 롯데에서 영입한 선발투수 김정행도 있었습니다.

그는 1973년 주니치 드래곤즈에 입단하여 선발투수로 데뷔했습니다. 그의 직구는 가끔씩 150km를 왔다갔다 했고, 다양한 변화구를 던졌지만 제구력이 그리 좋지는 않았고 위기관리능력이 좋지 않아 중계투수나 추격조 역할을 담당하던 투수였습니다. 그러다가 1984년 시즌이 끝난 후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하여 새로운 야구선수의 삶을 꿈꾸게 됩니다. KBO 리그 시절 때도 직구 구위와 다양한 변화구는 녹슬지 않았지만 제구력은 많이 나아지지 못했고, 오랜 시즌 동안 중계투수로 뛰면서 선발투수로서의 스태미나가 좋지 못했습니다. 그 때 당시 에이스의 기준 중 하나가 200이닝 소화였는데(현재로서도 이는 드물지만), 그가 4년 동안 뛰면서 소화한 이닝 중 최고기록은 118이닝, 200이닝의 반을 약간 넘는 수준입니다. 하지만 그는 4년 동안 꼬박꼬박 2번의 완봉을 기록하여 한 번 긁히는 날에는 누구라도 건들 수 없는 아우라를 뽑냈는데, 그 정점이 바로 1986년 기록한 노히트노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8665, 그는 빙그레를 상대로 5탈삼진, 4사사구로 노히트노런을 달성합니다. 다만, 그 시기와 맞물려 멕시코 월드컵이 진행되는 중이었고, 대한민국이 불가리아와 무승부를 거둬 8강 진출을 할 가능성이 생기면서 1면에 대문짝으로 나는 바람에 노히트노런이 제대로 각인되지 못했습니다. 그는 롯데에 뛰면서 4년 동안 28승을 기록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는 롯데에서 요구한 에이스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많지 않은 이닝에도 불구하고 두 번쯤은 에이스의 역할을 팬들에게 충분히 보여주었습니다.

 


3. 장호연(OB, 198842, 포수: 김경문)

 

(장호연 선수의 노히트노런에 대해서는 전 포스트에서 이미 한 번 설명드렸기 때문에 간단하게 적겠습니다.)

장호연 선수는 OB 한 팀에서 100승 이상을 기록한 유일한 투수로, 그리 좋지 않은 직구 대신 다양한 변화구와 맞춰잡기로 타자들을 요리했던 투수입니다. 1988년 개막전, 원래 정해져 있던 선발투수였던 김진욱 선수가 연습타구에 고간을 직격당하여 장호연 선수가 대신 등판하게 되었는데, 롯데 타자들을 상대로 1회부터 9회까지 맞춰잡는 피칭으로 노히트노런을 기록합니다. 그는 사사구 3개만 기록했을 뿐 단 하나의 삼진도 잡지 않았으며, 두 자리수 투구(99)로 노히트노런을 기록하는 진기록을 세웁니다. 그의 노히트노런과 롱런은 공의 구위를 보완하기 위해 만들어진 그의 피칭 스타일과 변화구 덕분이라고 확신합니다



잘 보셨나요? 다음 포스팅에서는 이동석, 선동열, 이태일 등 노히트노런을 달성한 다른 투수들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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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다홍빛하늘입니다:) 최근 제4WBC가 진행되고 있는데요, 우리나라 대표팀의 부진과 태도가 맞물려 그들에 대한 평가나 인지도가 많이 떨어진 상태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상태와 상대편의 상태를 깨닫고, 상대편과의 수준차를 극복하고 실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우연적으로 일어난 일이든, 수많은 노력으로 얻은 일을 계기로 자신만의 무기나 강점을 갈고 닦아야 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오늘은 노쇠화와 역경, 자신의 약점을 딛고 자신만의 주무기와 강점으로 야구인생의 제 2막을 열었던 선수들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 강명구




현재 삼성 전력분석원인 강명구 선수는 선수시절 ‘1툴 플레이어라는 별명이 있었습니다. 타자들에게 필요한 필수 5(타격, 파워, 주루, 수비, 송구) 중 오직 주루 하나만으로 2014년 은퇴할 때 까지 12시즌을 한 팀에서 보냈고, ‘대주자의 전설로 불릴 만큼 유니크한 선수생활을 보냈습니다. 진흥고와 탐라대를 거쳐 삼성 라이온즈에 21순위로 입단한 강명구는 주루실력은 괜찮았지만 타격과 파워는 프로에서 통할 실력이 아니었던 평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입단 3년차인 2005, 그는 44타수 밖에 나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109경기 21도루로 대주자 스페셜리스트의 생활을 시작합니다(타율도 .250으로 나쁘지 않았습니다). 이를 시작으로 2006년 시즌 1안타에도 불구하고 대주자로서 21개의 루를 훔쳤고, 2011년 시즌에서도 19도루를 기록함과 동시에 427일 홍상삼을 상대로 생애 첫 홈런을 쳐 KBO 시즌 공식 최고령 데뷔 홈런이라는 이색 기록도 세웁니다. 하지만 2014시즌 스프링캠프에서 공에 머리를 맞는 부상 등 여러 부상과 동시에 박찬도 등 젊은 선수들이 1군 엔트리를 채우자, 시즌 종료 후 방출되고 전력분석원이 됩니다. 비록 발 말고는 별 메리트가 없는 선수였고(2009년 상무 시절 북부리그 타격왕도 얻은 적이 있습니다), 당시 주전과 후보의 차가 작지 않았던 팀에서 엔트리를 채우기 위해 들어왔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바로 그가 있었기에 삼성 라이온즈는 2013KBO리그 첫 통합 3연패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최고의 명장면>

SK 와이번즈와의 2012년 한국시리즈 1차전, 1점차로 아슬아슬하게 리드하고 있던 상황에서 2루에 대주자로 출전한 강명구. 다음 타자였던 배영섭이 친 타구는 중간을 빠져나올 듯 보였습니다만 2루수의 글러브에 잡혀 내아안타가 됩니다. 하지만 강명구는 3루에서 멈추지 않고 바로 홈으로 달렸고, 공은 3루수를 거쳐 포수까지 갔지만 결국 득점합니다. 쐐기점이 된 이 점수로 선발투수 윤희상은 완투패를 당했고, 삼성은 SK42패로 꺾고 2012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합니다.



 

2. 장호연




OB 베어스에서 유일하게 한 팀에서 100승 이상을 올린 장호연 선수는 데뷔 첫 경기에서 완봉승을 거두었지만 시즌 617패로 다패왕에 오르는 등 초반에는 순탄치 않은 시즌을 보냈습니다. 그의 직구 구속은 130km 초중반에 머물렀고, 그렇다고 제구가 좋은 투수도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가 선택한 것은 공의 변화 정도와 방향을 극대화하는 것이었습니다. ‘한 경기에 같은 구종을 두 개 이상 던지지 않는다라고 했었고, 12가지 공을 던진다는 말도 있었을 정도로 다양한 구종을 던졌습니다. 그는 체인지업, 슬러브 등의 구종을 주로 던졌고 그의 주무기인 싱커로 맞춰잡는 투구를 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일찌감치 자기관리의 주요성을 깨닫고 겨울마다 꾸준히 하체를 단련했습니다. 효과는 엄청났습니다. 데뷔 2년차 1.58로 방어율왕에 오른 후 1993년까지 99이닝에 그쳤던 1991년을 제외하면 꾸준히 100이닝 이상을 던졌고, 통산 79완투로 역대 3위에 오를 정도로 완투형 선발투수의 모든 것을 보여줬습니다. 만약 그가 150km가 넘는 구속과 어마어마한 구위가 있었다면 그의 통산 승수인 109승은 넘었을 지도 모르지만, 79완투는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의 투구스타일은 선수생활의 롱런과 팀의 불필요한 투수진 낭비를 막는 역대급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최고의 명장면>

그는 무려 9번 개막전에 선발등판하여 개막전의 사나이라고 불렸는데, 그 중 가장 압권은 1988년 개막전일 것입니다. 원래 선발투수는 김진욱(KT 위즈 감독)이었으나 연습타구에 고간을 가격당해 땜빵으로 개막전 선발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몸이 완전히 풀리지 않았던 그는 최대한 맞춰잡는 피칭을 했고, 결국 볼넷 1개와 몸에 맞는 볼 2개를 제외하고 모든 타자를 출루시키지 않으며 노히트노런을 달성했습니다. 그의 노히트노런에는 조금 특별한 것이 있었는데, 삼진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 투구수 99개로 두 자리수 투구로 노히트노런을 만들어 낸 것이었습니다(전 세계로 확대해봐도 이러한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고 할 수 있습니다).

 



3. 송진우




송진우 선수는 KBO 투수 통산기록을 거의 독식하고 있을 정도로 오래, 그리고 꾸준히 선수생활을 했습니다(최다승, 최다이닝, 최다삼진 등...). 그도 앞에 설명했던 장호연 선수처럼 데뷔 첫 경기를 완봉하였고 99세이브로 준수한 활약을 보여 준 후 다음 해에도 1127세이브로 2년차 징크스를 극복하며 빙그레의 에이스로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구대성이 등장하기 전까지 선발, 중계, 마무리 등 확정된 보직이 없이 계속 던졌고, 결국 구위 저하와 구속 저하로 1997년 승수가 15승에서 6승으로 떨어집니다. 다음 시즌도 6승으로 부진하자 결국 구단은 그를 애리조나 교육리그로 보냈고, 거기에서 송진우 선수는 선수인생 2막을 열 구질을 배웁니다. 바로 서클체인지업입니다. 그는 메이저리그 중계를 보던 중 제이미 모이어를 보게 되었는데, 송진우 선수는 자신보다 3살이나 어리고 140km도 안 되는 직구를 던지는데도 불구하고 선발투수로 활약하고 있는 이유를 유심히 관찰하여 이가 서클체인지업 때문인 것을 알게 되었고, 교육리그에서 그립을 배우고 열심히 연습하여 다음 시즌인 199915승을 기록하여 기교파 투수로의 성공을 알리고 팀의 한국시리즈 우승에도 기여합니다. 이후에도 그는 200218승으로 199219승에 못지 않은 성적을 올렸고, 꾸준히 3점대 이내의 방어율과 준수한 이닝소화능력으로 최고령 완봉승, 2006829KBO 최초 20, 2008493000이닝, 2008662000탈삼진 등 200944세로 은퇴하기까지 각종 기록을 세웠습니다. 특히 은퇴하기 전 시즌에도 132이닝을 넘게 소화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최고의 명장면>

그의 선수시절 중 가장 최고였던 순간을 꼽자면 아직까지 누구도 달성하지 못한 200승 경기를 꼽고 싶습니다. 2005시즌 730199승을 거둔 후 부담감과 불운이 겹쳐 200승 도전이 연거푸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829, KIA와의 경기에서 타자들을 5이닝 5피안타 2볼넷 4삼진 1실점으로 막아 10-1200번째 승리를 이뤄냈습니다. 45기 끝에 이루어낸 성과라 더욱 기뻐했고 팀과 팬들 모두 그의 승리를 축하했습니다. 하지만 tv로는 이를 축하하지 못했는데, 그 때 당시 KBO 리그의 인기가 잠시 주춤했던 시기이도 했고 라이언킹이승엽이 일본에 진출하여 본격적으로 활약하기 시작하면서 SBS 스포츠 채널에서 NPB 경기를 중계하고 송진우 경기를 녹화중계하는 결정을 했기 때문입니다.

 



인생에 굴곡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좌절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이를 극복하고 인생의 제 2막을 여는 사람들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스포츠도 그렇습니다. 힘찬 20대를 지나고 30대가 되어 일어난 노쇠화로 또 다른 20대에 밀릴 위기에 놓이면 선택은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팀이 나타날 때 까지 팀을 떠돌아 다니거나, 20대 선수들을 압도할 수 있는 무기를 갈고닦아 계속 팀의 주축으로 남는 선택입니다. 비록 그들은 남들보다 특별하지 않았던 적이 있었지만, 자신만의 강점을 극대화하거나(강명구), 노력으로 향상시킬 수 있는 변화구를 연구하거나(장호연), 아예 투구 스타일을 바꾸면서(송진우) 선수생활을 연장했습니다. 우리도 이들처럼 자신의 역경을 이기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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