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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다홍빛하늘입니다:) 최근 2017년 제4WBC 개최를 앞두고 우리나라 대표팀이 승리를 위해 힘찬 걸음을 내딛고 있는데요, 일본 프로팀과의 평가전에서의 패배를 발판삼아 최근 쿠바와의 평가전 2차례를 모두 승리하면서 관심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나라 프로야구의 시작과 초창기 프로야구의 인기를 끈 라이벌에 대해서 글을 써볼까 합니다.

 

1982327, 서울 동대문야구장에서 프로야구 첫 시즌의 첫 경기가 개최됩니다. 대구경북을 연고지로 하는 삼성 라이온즈와 당시 대전을 연고지로 했던 OB 베어스 간의 경기였습니다. 경기 후 포커스는 10회말 끝내기 만루홈런을 쳐낸 이종도에 쏠려 있었지만, 그 경기에서 첫 안타, 첫 홈런, 첫 타점을 기록하여 프로야구의 첫 기록을 세운 선수도 있었습니다. 바로 '헐크' 이만수였습니다. 그는 초창기 삼성 라이온즈의 안방마님을 도맡았고, 홈런을 치면 펄쩍 뛰고 함성을 지르는 투지있는 플레이(그 덕분에 적지 않은 118개의 사구를 얻기도 했습니다)로 인기를 얻었습니다.

 이만수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1982년 시즌이 OB 베어스의 우승으로 끝난 후, 여러 가지 진기록들이 주목을 받았습니다. 백인천(MBC)의 타율 .412, 박철순(OB)22연승이라는 기록들이 세워졌지만, 투타 겸업을 하며 3할 타율, 두자리수 홈런, 10승을 기록한 다재다능한 선수도 그 명단에 올랐습니다. ‘오리궁뎅이김성한이 그 주인공이었습니다. 개막 당시 6팀 중 가장 적은 17명의 선수로 시작했기 때문에 투수와 타자가 모두 부족할 수 밖 에 없었고, 결국 타자로 나오지 않았을 때에는 투수로 마운드에 서야 했습니다. 그는 1982년부터 2004년까지 선수, 코치, 감독 시절을 모두 해태-KIA에서 보낸 프랜차이즈 맨이었습니다.

 김성한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학교에 늦게 입학했고, 중학교 2학년 때 야구를 시작했지만 군산상고 시절 팀의 타선을 이끌었고, 1979년 실업야구 한국화장품에 입단하여 3연타석 홈런 3회를 포함 3년동안 대통령배 실업야구 3시즌 연속 홈런왕으로 군림한 선수가 있습니다. 1982년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 시 31세로 적지 않은 나이였지만, 그는 22개로 초대 홈런왕에 오르면서 클라스는 여전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바로 미스터 콧수염김봉연입니다.

 김봉연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바로 앞에서 설명했듯이, 1982년 시즌까지는 홈런하면 김봉연 이었습니다. 김성한의 홈런 수는 13개로 불과했지만, 100이닝을 넘게 던지며 10, 방어율 2.88로 투수로서도 정상급 실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만수는 타율과 타점에서 김성한보다 저조한 성적을 기록했지만 KBO리그에 완전히 적응했고, 결국 1983년과 84년 연속 홈런왕이 됨과 동시에 1984.340, 23홈런, 80타점으로 트리플크라운을 달성합니다. 김봉연은 1983년 교통사고로 인한 휴유증이 생겼고, 김성한은 투수의 짐을 내려놓기 시작하면서 이때부터 김성한과 이만수 사이에 라이벌 구도가 형성되게 됩니다.


이만수의 활약에 자극을 받은 것처럼, 82년과 84년 각각 13, 12개로 불과했던 홈런수가 85년 개로 훌쩍 뛰면서 같은 시즌 22개의 홈런을 친 이만수와 함께 공동홈런왕에 오릅니다. 다음 해인 1986년에는 18개의 홈런을 친 김성한이 2개 차로 이만수를 앞섰지만, 같은 팀 타자였던 김봉연이 22개의 홈런을 쳐내며 홈런왕을 차지했고, 이만수는 김봉연과의 경쟁 끝에 KBO 리그 최초로 100홈런을 달성합니다.(이후 김봉연은 1987년 홈런수가 6개로 급감했고, 1988년 시즌 후 은퇴합니다. 아무래도 적지 않은 나이가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1987년 삼성의 거구 2루수 김성래에게 홈런왕 자리를 잠시 빼앗겼지만, 1988년 김성한이 30개의 홈런으로 KBO리그 최초 30홈런을 달성했고, 1989년에도 26개로 홈런왕이 됨과 동시에 30개의 도루로 KBO 최초 20-20 클럽 가입, KBO 최초 시즌 30홈런, 시즌 30도루를 달성한 최초의 선수가 됩니다. 이만수도 분전했지만 장채근, 유승안에 밀려 3위를 기록했습니다.

 

1990, 빙그레 다이너마이트 타선의 핵인 장종훈 선수가 떠오르기 시작하며 그들은 홈런왕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됩니다. 그들도 꾸준히 두자리수 홈런을 쳤고, 김성한은 199123, 이만수는 199222개 등 20홈런 이상을 기록하기도 했지만 노쇠화에 의해 파워와 스피드가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만수는 지명타자로 선수생활을 이어갔지만 1995년 신인왕을 차지한 이동수에게 밀려 1997년 시즌 이후 구단과의 불화 끝에 쓸쓸히 은퇴했고, 김성한도 1994년 자신의 주 포지션인 1루수에서 밀려나 플레잉코치로 전락하여 1995년 시즌 이후 은퇴를 선언합니다.

 

현재 홈런이라면 이승엽, 박병호 등의 이름을 떠올리지만 초창기 프로야구의 강타자는 김봉연, 김성한, 이만수였습니다. 그들은 초창기 프로야구의 인기를 이끌었고, 팬을 몰고 다녔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야구의 재미를 깨우치게 해주었던 선수들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이름과 프로야구에게 제공했던 공로를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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