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다홍빛하늘입니다:) 축구, 농구, 배구 등과 함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프로스포츠 중 하나인 프로야구는 1982년 개막 이래로 2016년 시즌까지 총 130,119,612명의 관중이 다녀갔을 만큼 큰 인기를 자랑합니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야구장을 찾지만 대부분이 자신의 팀이 상대 팀을 누르고 이기는 것을 보기 위해 야구장을 찾습니다. 특히 서로가 라이벌 관계라면, 한 경기에 엄청나게 많은 관중이 들어서서 경기를 보는 것은 기정사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80년대 홈런왕 라이벌이었던 세 명의 타자에 이어, 같은 구장을 쓰는 두산과 LG의 90년대 에이스 라이벌, 김상진과 이상훈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김상진
‘배트맨’ 김상진은 1970년에 태어나 1989년 청강고(현 마산제일고) 야구부를 졸업합니다. 그 당시 청강고 야구부의 인지도는 그리 높지 않아서 드래프트에 지명되지 못했고, OB 베어스에 신고선수로 입단하게 됩니다. 타자들에게 배팅볼을 던지고 다시 정리하는 힘들고 지루한 일. 하지만 그는 이를 견디고 열심히 노력하여 1990년 정식으로 지명을 받아 등록됩니다.(한용덕, 김현수 등 신고선수 신화의 한 일원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 당시 OB 베어스는 예전의 영광을 뒤로 하고 1990년 꼴찌를 기록한 팀이었는데요, 이로 인한 리빌딩의 일환으로 그는 연습생 출신으로 1군에 등록됐고, OB 베어스는 다시 한 번 꼴찌를 기록했지만 그는 선수생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10승을 기록한 김동현 선수와 함께 10승을 거둬 팀에서 10승을 기록한 두 명의 선발투수 중 하나가 됩니다. 1991년 이후로 그는 5년 연속 10승 이상을 달성하며 팀의 에이스로 군림했고, 특히 1995년에는 17승 7패, 2.11의 방어율로 몇 년 전까지 꼴찌였던 팀을 우승으로 이끕니다. 특히 13완투, 8완봉승(타이 기록), 3경기 연속 완봉승(단 5명만이 달성한 기록) 등 완투에 특화된 모습으로 팬들과 선수들의 사기를 북돋기도 했습니다.
2. 이상훈
‘삼손’ 이상훈은 1971년 태어나 서울고등학교와 고려대 야구부를 거칩니다. 초반에는 별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지만, 꾸준한 웨이트트레이닝으로 구속을 늘렸고 성균관대학교와의 경기에서 14타자 연속 탈삼진으로 주목을 받아 1993년 2억의 계약금에 LG에 입단합니다. 1994년 16승의 김태원, 15승의 정삼흠과 함께 18승을 기록했고, 김재현, 유지현, 서용빈의 신입 트로이카의 활약까지 겹쳐 LG의 우승에 기여합니다. 1995년에는 20승 5패, 2.01의 방어율, 12완투, 3완봉을 기록하여 김상진과의 라이벌 구도를 세웠습니다.
3. 김상진 vs 이상훈
OB 베어스와 LG 트윈스, 두 구단은 같은 구장인 잠실구장을 쓴다는 점에서 라이벌이었습니다. 1982년 개막 당시에는 OB 베어스의 연고지가 대전이었지만, 충청권에 선수가 없다는 이유로(개막 당시 팀들이 선수를 얻기 위해 자신의 연고 내 선수들을 지명하였습니다. 그 당시 프로야구는 거의 고교야구 대항전을 보는 기분이었죠) 3년 후 대전을 빙그레 이글스에게 넘기고 동대문야구장으로 연고지를 옮깁니다. 하지만 실업야구 등의 반발로 이듬해 그 팀은 다시 구장을 잠실구장으로 옮겨 MBC 청룡(현 LG 트윈스)와 한솥밥을 먹습니다. 당연히, 같은 하늘에 두 태양은 없다는 말처럼, 누가 이 구장의 진정한 주인이고 누가 얹혀 사는 구단인지에 대해 각 팬들 사이에 마찰이 생기면서 두 구단은 자연스레 라이벌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95년 시즌 각 구단의 에이스 대결이 펼쳐지면 잠실구장은 순식간에 만석이 되었고, 마치 1980년대 시즌의 선동열과 최동원과의 맞대결을 보는 것 같은 긴장감과 흥분에 휩싸였습니다. 그 시즌 동안 두 선수는 총 3번의 맞대결을 했고, 이를 제외하면 두 선수는 똑같이 17승을 거둔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그 3번의 맞대결에서 이상훈은 모두 승리하였고, 그 3승으로 이상훈은 최후의 토종 좌완 선발 20승, 다승왕의 타이틀을 모두 가져갑니다. 롯데와의 준플레이오프에서 이상훈이 별 활약을 하지 못한 채 한국시리즈 진출권을 내주면서 김상진은 1995년 시즌 우승반지를 따는 데 만족해야 했습니다.
4. 그 후
1995년 시즌 이후, 두 선수는 위력적인 선발투수의 모습을 다시 보이지 못합니다. 김상진 선수는 혹사, 이상후 선수는 손가락 혈행장애 때문이었죠. 김상진 선수는 본격적으로 선발투수로 활약하기 시작했던 1991년부터 1995년까지 평균 182.1이닝을 던졌고, 결국 평소의 스터프가 퇴색되면서 제구에 의존하게 됩니다. 이후 3년 동안 3점대 방어율, 24승을 채우며 OB 베어스의 선발 로테이션을 채웠고, 1998년 시즌 후 삼성에 현금 트레이드되어(당시 한국시리즈 우승에 목말라 있던 삼성은 막강한 자금력을 이용해 트레이드 형식으로 임창용, 김기태, 김현욱 등의 선수들을 영입하고 있었습니다). 초반 2년간은 두 자리 승수를 거뒀지만, 노쇠화와 부진으로 sk에 트레이드되고 2003년 시즌 후 방출당하며 은퇴수순을 밟습니다. 이상훈 선수는 앞서 설명한 손가락 혈행장애로 선발 투수로 활약할 수 없었고, 기존 마무리였던 김용수 선수와 보직을 바꿨고 1997년 10승 37세이브로 성공적인 보직 변경을 해냅니다(김용수 선수도 만 36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도 16승을 거두며 선발투수로도 위력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이후 일본 주니치 드래곤즈에서도 중간계투, 마무리 역할로 이종범, 선동열 등과 함께 센트럴리그 우승을 이끌기도 했습니다. 2000년 보스턴 레드삭스에 입단하여 메이저리그에 도전했지만 적지 않은 나이로 인해 많은 기회가 주어지지 못하자 2002년 다시 LG로 돌아옵니다. 2002년 시즌에도 1점대 방어율로 팀의 핵심적인 중계투수로 군림했지만 한국시리즈 6차전 이승엽에게 동점 3점 홈런을 허용하였고, 2004년 구단과의 불화로 SK로 트레이드되자 시즌 중 자신의 부진과 친정팀 LG에 대한 마음 때문에 높은 연봉에도 불구하고 은퇴선언을 해버립니다.
그들의 라이벌 관계는 80년대 대표적인 에이스 라이벌이었던 선동열과 최동원에 비하면 그렇게 크지 않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선동열과 최동원처럼 그들 사이에 좋은 관계를 유지했고, 서로를 넘기 위해 노력하면서 KBO 통산 122승(김상진), KBO, NPB, MLB를 모두 경험한 유이한 투수(이상훈)이라는 업적을 이루어냈습니다. 그들이 등판하는 날이면 그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상대팀에게 위압감을 줬으며, 승을 거두기라도 하는 날에는 그것이 연패의 끝점, 연승의 시작점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에이스라는 이름은 투수에게 위압감을 주지만, 자기자신을 믿게 만들며 자신의 능력을 최대치로 올리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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