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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화지에 데칼코마니만 찍기에는 너무 아깝지 않은가


-나의 삼촌 브루스 리(천명관 저),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장영희 저)-

 

 한번 주위를 둘러보자. 같은 사회에 속해 있는 우리, 그러니까 우리라는 단어 안에 속해있는 사람들에게서는 대개 동질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매일 비슷한 시간에 일어나 비슷한 아침밥을 먹고, 또 비슷한 일을 하며 비슷하게 휴식을 가지며 살고 있다. 특히 학생들의 경우에는 더하다. 같은 학교에 같은 시간에 등교해서, 같은 수업을 지루하게 듣고, 또 점심 식사를 하고, 같이 공부를 조금 더하다가 자율학습을 하고, 같은 시간에 집이나 기숙사로 돌아간다. 물론 사이사이에 각자 다른 것들도 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이렇게 매일 비슷한 상황과 마주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같은 상황에 놓인 우리들의 얼굴 표정은 전부 같지만은 않다. 아침밥을 먹을 때를 생각해보자. ‘우와 이 떡갈비 맛있다면서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먹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맛있는 떡갈비는 안중에도 없이 엄마가 깨워서 억지로 밥을 먹으며 잠을 더 자고 싶어서 찌푸린 표정을 짓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왜 같은 상황에 놓여있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는 걸까?

 

 행복을 추구하는 행위 자체는 인간의 본성이라고 할 만큼 근원적인 욕구이고, 누구나 그 욕구대로 행복을 갈망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우리가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처럼, 모두가 똑같은 행복을 갈망하지는 않는다. 각자 생각도 다르고, 자신 스스로가 만족을 느끼는 부분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들어서 우리가 갈망하는 행복의 의미가 조금 달라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분명 행복을 추구하고 있는 것 같은데, 뭔가 진정으로 행복하지 않은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생기는 것 같다. 행복을 추구하는데 행복하지 않은 삶을 산다는 것이 상당히 모순적이다.

 

그에 대한 이런 저런 이유를 생각해보다 보니 남과 다른 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우리나라의 사회 풍토가 문득 떠올랐다. 아직까지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장애인들이나 성소수자들과 같은 나와는 다른 사회적 약자에 대한 멸시적인 시선을 보내고, 타인에 대한 경계적인 시선으로 남들과 조금 다른 행동들에 대해 간섭하며 쟤 왜 저래라는 말을 먼저 하곤 한다. 이런 것처럼 우리가 행복을 추구할 때, 타인의 다름은 무시한 채 우리사회가 절대적인 행복이 있는 것처럼 여기고, 개인이 각자 행복을 추구하는 것에 대해 은연중에 제약을 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라는 장영희 교수님의 책 속의 여러 구절에서 책을 가까이 하라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 자신이 겪었던 여러 가지 예시를 들고 있다. 먼저 ‘After a while’이라는 시를 소개하며 학생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적어 놓은 부분에서는 ‘After a while’이라는 시가 여학생들이 공부는 대충하고 결혼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을 바꿀 수 있는 시라서 한 번쯤은 그런 여학생들에게 권해주고 싶다고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다른 파트에서는 이런 말도 한다. 명품 백을 수집하는 사람들에게 왜 명품 백을 사느냐고 물어봤더니 다른 사람들이 쳐다보는 눈이 좋아서 그랬다고 대답을 했다. 그런데 그 대답을 듣고 장영희 교수님은 자기가 놀랐다며 오히려 그 가방안의 내용물의 중요한 것이 아닌가에 대해 이야기를 하시며 책이 좋은 예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교수님이 얘기한 말들은 사실 그냥 보기에는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교수님이 앞서 이야기한 내용들을 맞는 것 같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예시는 나에게 약간의 불편함을 가져다주었다. 물론 나도 학생들이 좀 더 나은 길로 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은 교수님의 의도를 잘 알고 있고, 책을 읽는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지에 대해 알고 있으며 동의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은 이에 대해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책을 보는 대신에 명품 가방을 사서 매고 다니는 것을 통해 책을 읽음으로써의 행복보다 더 큰 행복을 느낄지도 모른다. 앞서 말했듯이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가는데, 자신이 당장의 행복에 대해 만족감을 느끼고 살아간다면 그것으로 된 것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미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자기가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아는 사람들의 행동에 대해 우리가 독서를 조금 안한다고 뭐라고 왈가왈부할 수 있을까.

 

행복이란 그런 것이다. 물론 세상은 사회적 분위기를 통해 성공하면, 남들이 부러워할 정도가 되면 넌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다’, ‘독서를 통해 마음의 양식을 가꾸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고 주입을 하곤 한다. 하지만 자신이 진정으로 행복하다는 느낌을 받을 때는 사회가 주입한 절대적인 성공을 이루어냈을 때가 아니라 무언가 부족하더라도 자신이 만족할 정도가 되었을 때라는 것이다.

 

 나는 절대적인 행복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자신에 처해진 자신의 상황에 맞게 행복을 다시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세상이라는 곳은 너무나도 상대적인 공간이기 때문이다. 똑같은 수학시험을 친 상황을 생각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몇몇 학생들은 점수를 잘 받았을 것이고, 또 몇몇의 학생들은 눈물을 머금게 하는 점수를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앞자리 수가 5가 되지 않는 점수를 받았다고 해서 그 사람이 이 시험을 치고 행복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또 절대적인 점수로 봤을 때 시험을 잘 쳤다고 볼 수 있는 사람이 전부 행복을 느끼지도 않는다. 자신이 원하던 점수에 다다르지 못해 못내 아쉬워하며 만족하지 않을 수도 있다. 행복이란 그런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만족스럽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내가 아니면 말짱 도루묵인 것이다.

 

 ‘나의 삼촌 브루스 리’(천명관 저)에서 삼촌은 평소 이소룡을 동경했었다. 그래서 혼자 무술을 익히고, 자신이 제 2의 이소룡이 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때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홍콩에서 이소룡과 비슷한 사람을 선발하는 오디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삼촌은 엄청나게 가고 싶어 했지만, 금전적인 문제로 인해 꿈을 꺾을 위기에 처해졌다. 그 때 구세주가 나타났다. 바로 마 사장이다. 마 사장은 삼촌의 꿈을 지원해 주기위해 홍콩행 밀항을 주선해 주어 이소룡 오디션에 참가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그런데 절호의 기회임에도 실패를 두려워하던 삼촌이 망설이자 이런 말을 했다.

 

 “난 중국 사람도 아니고 한국 사람도 아냐, 여자도 아니고 남자도 아니지. 생긴 건 여자지만 남자의 일을 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더 이상 젊지도 않지만 아직 늙은이는 아냐. 그게 바로 지금의 내 인생인데, 그럼 도대체 난 뭐지?”

 

 이 말은 삼촌이 현재 우리 사회 대부분의 사람들과 같은 처지에 놓여 있지만 우리들과는 다른 길을 걸어갈 수 있는 큰 원동력이 되었다. 이소룡이 되는 것. 분명 어렵고 험난한 길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좋아했던 이소룡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왔다. 결국 이소룡 오디션에 참가하지 못하고 안 좋은 일에 휘말리게 되어 안타깝게도 동경하던 이소룡이 되는 것에 실패하고, 아류 액션배우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촌은 자신의 꿈을 좇던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살아갔다. 나는 삼촌의 삶의 태도에서 우리나라 최근 사회 이슈 중 하나인 금수저 흙수저 론이 떠올랐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사회구조 탓에 노력해도 되지 않는 것을 하는 청년기의 시간을 보내는 것을 불행하다고 이야기한다. 사회적 문제로 인해 빈부격차가 심화되며 그들과의 비교를 통해 상대적 박탈감이 심해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우리가 불행하다고 여기는 그 시간들에서 진정으로 행복을 느낄 수 없는 것일까. 그냥 우리가 남과 비교하며 나는 불행하다고 쉽기 치부해 버린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삼촌의 영원한 우상인 이소룡은 산다는 것은 그저 순전히 사는 것이지 무엇을 위해 사는 건 아니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이소룡의 이 말처럼 순전히 그냥 내 인생을 사는데 절대적인 행복이라는 가치를 들이밀며 남과 비교하며 살기는 너무 피곤한 일이 아닐까. 남들 보기에는 조금 부족해 보이고 그럴지 몰라도 그냥 내가 만족하는 삶을 살면 그 자체로도 충분히 행복하다고 여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하이얀 도화지에 자신이 마음에 드는 색깔을 칠해 넣어 충분히 자신이 만족하는 멋있는 작품을 만들 수 있다. 많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도화지에 굳이 데칼코마니를 찍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것이 바로 모두가 똑같은 삶을 살고, 똑같은 행복을 얻을 수는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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