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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다홍빛하늘입니다:) 모든 스포츠에는 경기를 할 때 마다 기록이 남겨지고, 그 기록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선수들을 기억합니다. 야구도 예외는 아닙니다. 다승 하면 사이 영, 탈삼진 하면 놀란 라이언 등 많은 선수들을 기억하고 추억해냅니다. 하지만, 별 다른 기록을 남기지 못했더라도 딱 하나의 찬란한 기억으로 인해 기억되는 선수들도 존재합니다. 그러한 의미로, 이번 포스팅에는 KBO 리그에서 노히트 노런을 달성한 선수들(외국인 제외)에 대해 살펴보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4. 이동석(빙그레, 1988417, 포수: 유승안)

 

빙그레 이동석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장호연이 개막전 노히트노런을 달성하고 15일 후, 또 다시 다른 투수가 노히트노런을 달성합니다. 그것도 KBO 리그 최초의 무사사구 노히트노런이 말입니다.

주인공은 바로 빙그레의 이동석. 그는 1987년 빙그레에 입단하지만 1년 차 때는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한 채 2년차를 준비하고 있던 투수였습니다. 1988417, 해태 전 그에게 선발 출격 명령이 떨어졌을 때, 당시 감독이었던 김영덕 감독은 아마 이 등판을 계기로 그가 한층 더 발전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것도 그럴 것이, 당시는 시즌 초반이었고, 무엇보다 상대 선발 투수가 당대 최고의 투수였던 선동열 이었기 때문입니다.(1988년 시즌이 끝난 후, 그는 1.21, 200탈삼진, 16승을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이동석 선수는 선동열을 상대로 9이닝동안 무사사구 무피안타로 1:0 노히트노런을 기록합니다(수비의 실책 2개로 타자가 출루했기 때문에 퍼펙트게임이 성립되지 못했습니다. 두 실책 중 하나는 장종훈 선수가 저질렀는데, 그 게임의 유일한 득점을 올린 선수도 장종훈 선수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2004년 한국시리즈 배영수의 전철을 밟는 것 보다는 노히트 노런 달성이 더 나을 수도 있겠네요). 그는 선동열과의 맞대결로 얻은 1승을 포함해 시즌 7승을 거두어 차세대 에이스로 각광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 선수생활은 순탄치 못했는데요, 코치와의 불화로 출전기회가 줄어들고, 그나마 주어진 출전기회에서도 좋은 피칭을 하지 못하여 1991년 시즌 후 쌍방울로 현금트레이드됩니다. 그 후에도 구위를 회복하지 못하고 1군에서 밀린 체 1993년 은퇴합니다. 비록 7년간의 길지 않은 선수 생활이었지만, 신인 때, 선동열을 상대로, 무사사구로, 기록한 노히트 노런 하나로 우리는 그의 선수 생활을 추억할 수 있을 것입니다.

 

5. 선동열(해태, 198976, 포수: 장채근)

 

선동열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그렇습니다. KBO리그에서 최고의 투수 중 한 명인 무등산 폭격기선동열, 그도 노히트노런을 한 번 기록한 적이 있습니다. 1985년 입단하여 루키 시즌에 그 당시 최고의 에이스였던 최동원과 라이벌을 형성하고, 최동원이 노쇠화와 부진으로 정상에서 내려갔을 때부터 KBO를 폭격한 투수. 그 당시 광속구라고 불렸던 150km대의 속구와 날카로운 슬라이더 만으로 리그를 지배한 투수. KBO 리그 평균 방어율이 1.20인 선수에게 커리어 하이 시즌이라는 말을 붙이긴 좀 이상할 수도 있지만, 특히 1989년은 21, 승률 .875, 방어율 1.17 등으로 평균을 웃도는 시즌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 정점을 찍은 198976, 9이닝동안 9삼진, 3사사구로 노히트노런을 기록합니다. 그는 노히트노런 달성한 이후에도 승승장구했고, 건초염으로 시즌아웃된 1992(그 와중에도 방어율은 0.28이었습니다), 64, 2.73으로 부진(?)1994년을 제외하면 정상급 선발과 마무리로 활약하고 33살 적지 않은 나이에 일본 주니치 드래곤즈로 입단합니다. 첫 시즌에는 한국과 일본 야구 수준의 갭으로 인해 0.1이닝 7실점과 도중 2군으로 내려가는 등 부진했지만, 혹독한 훈련으로 이후 2년 동안은 모두 1점대 방어율과 38세이브, 29세이브로 일본 정상급 마무리로 군림하고 2년 후 은퇴하여 15년 선수생활에 마침표를 찍게 됩니다.(선동열 선수의 경우 따로 포스팅을 하나 해볼 생각입니다.)

 

6. 이태일(삼성, 199088, 포수: 이만수)


이태일 삼성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KBO 리그의 노히트노런에는 각각 특이점이 존재합니다. 최초의 노히트노런(방수원) 무탈삼진 노히트노런(장호원), 한국시리즈 노히트노런(정명원) 등이 그것이죠. 지금 소개할 노히트노런도 신인 최초 노히트노런이라는 꼬리표가 붙습니다. 그 주인공은 바로 삼성에서 뛰었던 이태일입니다. 그는 고등학교 때 까지는 별 주목을 받지 못한 채 영남대학교에 입학했지만, 당시 코치였던 성낙수 코치의 집중적인 지도로 대륙간컵 국가대표까지 뽑히게 됩니다. 삼성에 입단하여 삼성의 차세대 에이스가 될 기대를 받았지만, 초반에는 부진 후 2군까지 강등되었는데, 변화구가 슬라이더 이외에는 거의 없었고 투구폼 개조 중 부상까지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2군에서 슬라이더를 받쳐줄 구종이자 언더핸드 투수라면 거의 필수구종이었던 싱커를 배웠고, 7월에 1군에서 첫 승을 거둔 후 무려 8연승을 이어가며 돌풍을 일으킵니다. 8연승 중에는 88일 롯데를 상대로 4삼진 3사사구로 기록한 노히트노런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데뷔시즌, 그는 13승을 거둡니다. 첫 시즌을 고려했을 때 매우 성공적인 기록이었습니다. 이 기세를 몰아 다음 두 시즌에도 연속 10승 이상을 거두었지만, 혈전증이라는 지병으로 인해 다음 2시즌은 부진했고, 95년도 시즌에는 연봉 삭감에도 불구하고 재활을 통해 선수생활을 이어가고자 노력했습니다. 1996년에도 그는 복귀를 위한 노력을 이어갔지만 혈전증의 악화로 결국 다음 시즌 은퇴를 선언합니다. 야구에는 만약이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태일 선수의 경우는 혈전증이라는 지병이 그의 야구선수 생활에 너무 큰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너무 아쉬운 케이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 포스팅에서는 노히트노런을 기록한 또 다른 투수인 김원형, 김태원, 정명원, 정민철, 송진우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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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다홍빛하늘입니다:) 모든 스포츠에는 경기를 할 때 마다 기록이 남겨지고, 그 기록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선수들을 기억합니다. 야구도 예외는 아닙니다. 다승 하면 사이 영, 탈삼진 하면 놀란 라이언 등 많은 선수들을 기억하고 추억해냅니다. 하지만, 별 다른 기록을 남기지 못했더라도 딱 하나의 찬란한 기억으로 인해 기억되는 선수들도 존재합니다. 그러한 의미로, 이번 포스팅에는 KBO 리그에서 노히트 노런을 달성한 선수들(외국인 제외)에 대해 살펴보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1. 방수원(해태, 198455, 포수: 유승안)

 

KBO 리그의 첫 노히트 노런의 영광은 방수원 선수에게 돌아갔습니다. 박철순, 최동원 등 초기 프로야구를 평정했던 투수들이 아니라는 점에 약간은 의아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선발보다는 중계투수 역할, 땜빵 선발 등 마당쇠 역할로 팀에 공헌했던 선수입니다. 그는 프로야구 첫 시즌이었던 1982년 부상당한 선발투수를 대신하여 154이닝과 6승으로 선전했으나 다음시즌 선발투수인 이상윤이 로테이션을 채우기 시작하면서, 그는 은퇴할 때 까지 정해진 보직 없이 등판하게 됩니다.

KBO 리그 최초 노히트노런이 나온 그 날에도, 방수원 선수는 선발진에 구멍인 생긴 까닭에 임시로 등판하게 되었습니다. 그때까지 그는 한 차례의 승리도 거두지 못 한 터라, 감독도, 선수도 모두 2~3이닝만 어떻게든 막기를 기대했습니다. 방수원 선수에게 선발 투수를 맡긴 건 시즌 중 얼마 없는 일이었고, 혹여나 실점이나 안타 하나면 교체될 수 있다는 생각에 구위로 상대방을 누르는 대신 최대한 맞춰 잡는 투구를 선보였습니다. 그렇게 6, 7, 8회가 지나고, 9회가 되자 관객석과 덕아웃에 수많은 대화가 오고갔습니다. 과연 여기서 KBO 리그 최초의 노히트노런이 세워질 것인지, 그리고 그 주인공이 방수원 선수가 맞는지에 대해서였습니다. 그리고 9,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삼진으로 잡으면서 그는 삼미 슈퍼스타즈를 상대로 9이닝 동안 6삼진, 3사사구, 무피안타로 KBO 최초로 노히트노런 기록을 달성합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그의 야구선수로의 삶은 순탄치 못했습니다. 1984년 그의 기록에는 단 1승만이 적혀져 있었고(노히트 노런으로서 기록한 1승이 시즌의 유일한 승리였습니다), 그 후에도 여전히 마당쇠 역할을 수행하다가 1989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합니다. 비록 원년 시즌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선발 로테이션을 채운 적이 없었고, 당시에는 선발투수에서 밀려나면 중계투수로 뛴다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에 시즌 중 그의 능력을 온전히 평가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구위가 좋지 않은 직구 대신 커브, 슬라이더, 체인지업 등 다양한 변화구를 사용했고, ‘무등산 폭격기선동열이 고등학교 시절 5.18 민주화 운동 당시 인연을 맺어 그에게 슬라이더를 처음 가르쳐 주기도 했습니다. 선발 로테이션에 들지 못하고 보직 없이 팀을 위해 던졌던 그 때, 야구를 포기할 수도 있었지만 이를 극복하고 묵묵히 희생한 것이 아마 KBO 리그 최초 노히트노런이라는 선물을 그에게 준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2. 김정행(롯데, 198665, 포수: 한문연, 김용운)

1982, 우리나라가 첫 프로야구 시즌을 보낼 때, 1936년 만들어진 일본 프로야구는 벌써 47년째 시즌을 맞이하고 있었고, 그만큼 실력 차가 컸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KBO에서는 재일동포에 한하여 일본에서 활약했으나 밀려난 프로야구 선수들을 영입하기로 합니다. 유일무이한 시즌 30승과 400이닝을 기록한 너구리장명부, 김시진과 듀오를 이루며 활약했던 황금박쥐김일융 등 많은 재일교포 선수들이 KBO 리그에서 활약했습니다. 그 중에는 롯데에서 영입한 선발투수 김정행도 있었습니다.

그는 1973년 주니치 드래곤즈에 입단하여 선발투수로 데뷔했습니다. 그의 직구는 가끔씩 150km를 왔다갔다 했고, 다양한 변화구를 던졌지만 제구력이 그리 좋지는 않았고 위기관리능력이 좋지 않아 중계투수나 추격조 역할을 담당하던 투수였습니다. 그러다가 1984년 시즌이 끝난 후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하여 새로운 야구선수의 삶을 꿈꾸게 됩니다. KBO 리그 시절 때도 직구 구위와 다양한 변화구는 녹슬지 않았지만 제구력은 많이 나아지지 못했고, 오랜 시즌 동안 중계투수로 뛰면서 선발투수로서의 스태미나가 좋지 못했습니다. 그 때 당시 에이스의 기준 중 하나가 200이닝 소화였는데(현재로서도 이는 드물지만), 그가 4년 동안 뛰면서 소화한 이닝 중 최고기록은 118이닝, 200이닝의 반을 약간 넘는 수준입니다. 하지만 그는 4년 동안 꼬박꼬박 2번의 완봉을 기록하여 한 번 긁히는 날에는 누구라도 건들 수 없는 아우라를 뽑냈는데, 그 정점이 바로 1986년 기록한 노히트노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8665, 그는 빙그레를 상대로 5탈삼진, 4사사구로 노히트노런을 달성합니다. 다만, 그 시기와 맞물려 멕시코 월드컵이 진행되는 중이었고, 대한민국이 불가리아와 무승부를 거둬 8강 진출을 할 가능성이 생기면서 1면에 대문짝으로 나는 바람에 노히트노런이 제대로 각인되지 못했습니다. 그는 롯데에 뛰면서 4년 동안 28승을 기록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는 롯데에서 요구한 에이스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많지 않은 이닝에도 불구하고 두 번쯤은 에이스의 역할을 팬들에게 충분히 보여주었습니다.

 


3. 장호연(OB, 198842, 포수: 김경문)

 

(장호연 선수의 노히트노런에 대해서는 전 포스트에서 이미 한 번 설명드렸기 때문에 간단하게 적겠습니다.)

장호연 선수는 OB 한 팀에서 100승 이상을 기록한 유일한 투수로, 그리 좋지 않은 직구 대신 다양한 변화구와 맞춰잡기로 타자들을 요리했던 투수입니다. 1988년 개막전, 원래 정해져 있던 선발투수였던 김진욱 선수가 연습타구에 고간을 직격당하여 장호연 선수가 대신 등판하게 되었는데, 롯데 타자들을 상대로 1회부터 9회까지 맞춰잡는 피칭으로 노히트노런을 기록합니다. 그는 사사구 3개만 기록했을 뿐 단 하나의 삼진도 잡지 않았으며, 두 자리수 투구(99)로 노히트노런을 기록하는 진기록을 세웁니다. 그의 노히트노런과 롱런은 공의 구위를 보완하기 위해 만들어진 그의 피칭 스타일과 변화구 덕분이라고 확신합니다



잘 보셨나요? 다음 포스팅에서는 이동석, 선동열, 이태일 등 노히트노런을 달성한 다른 투수들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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