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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의 패권충돌시기 중립실용외교를 펼친 광해군을 통한

 사드배치에 대한 현실 인식과 대처

 

명청전쟁()’, 패권충돌의 시작


광해군 10년인 1618, 청나라의 전신인 후금의 누르하치가 만주지역의 군사요충지인 무순을 점령하면서 ‘명청전쟁’은 본격화됐다. 이에 명은 조선에 원병을 요구하는 국서를 보내지만 광해군의 입장은 단호했다. 안된다는 것이다군사들의 훈련부족과 명나라 파병요청 문서의 명의가 황제가 아닌 점 등을 이유로 파병 요청을 완곡히 거절한다. 광해군은 양국의 정세를 미루어 봤을 때 군대를 보내봤자 농부를 호랑이굴에 집어넣는 격이라고 판단했다. 반면 비변사 신료들의 주장을 달랐다. 그들은 재조지은(再造之恩)’에 대한 보답과 춘추대의(春秋大義)를 들어 원병을 보내야 한다고 맞서며 부모의 나라인 명의 부탁을 거절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대명 사대를 내세웠다.

결과적으로 명 조정에서 조선이 명의 요청을 관망하고 있다는 태도에 대한 불만이 커져 비변사들의 출병 채근이 힘을 얻어 출병을 최대한 미루려는 광해군의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후 전쟁은 광해군의 우려대로 심하 전투를 분수령으로 하여 전세가 완전히 청으로 기운다. 이 시점에서 광해군은 파병 장수 강홍집에게 비밀 지침을 내려 명나라 장수의 명령을 그대로 따르지 말고 신중하게 처신해 패하지 않는 전투가 되게 하라.”고 전달한다. 이는 청을 치는 주력은 명일 뿐 조선군은 단지 객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청에게 강조하여 조선과 청의 갈등을 사전에 방지하여 청에 의한 피해를 막는다.

 

 

남양주에 위치한 광해군'묘'

 

사드(THAAD)배치, 중국의 우월적 동북아 패권에 대한 미국의 견제


조선은 어떻게 패권충돌에서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었을까. 이는 광해군의 외교적 능력과 시대적 현실인식이 큰 역할을 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한국은 냉전 이후 패권을 다투는 미국과 중국의 갈등 속에서 곤욕을 치르고 있다. 그 결과물인 사드는 미국이 중국의 동북아지역의 우월적 패권을 견제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 볼 수 있다. 미국의 압력에 사드를 반대하지도 중국을 제대로 설득시키지 못해 현재는 중국으로부터 사드 보복을 당하는 실정이다. 지금 우리나라에게 필요한 현실 인식과 자세는 무엇인지 앞서 언급한 광해군의 외교로부터 알아보자.

 

광해군의 현실 인식과 사드의 실효성


사드배치의 필요성을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잣대는 과연 타 국가의 위험으로부터 국민의 생명을 보호할 수 있는 가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드에 대한 정확한 정보력이 필수이다. 광해군이 명청전쟁 초반부터 강력하게 명의 파병요청에 단호하게 거절 입장을 표명한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즉위 초반부터 북경 등지에 황신(黃愼, 1560~1617) 같은 조정의 중신을 꾸준히 정기적으로 파견해 주변국가의 동향을 탐지했기 때문이다. 여진과 같이 아무리 적대적인 상대라 하더라도 최소한 핫라인만큼은 유지해야 하고 우리 정보의 유출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외교적 신념이었다. 그는 이로부터 누르하치의 막강한 기마병단 병력의 규모를 파악하여 청과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견제하되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는 기미책을 사용한다.

마찬가지로 사드 또한 실효성을 세심하게 파악하고 미국의 군사적, 정치적 계획을 수집하여 그에 상응하는 외교적 전략을 세우는 것이 우선시되어야 한다. 과연 사드가 우리나라의 국방에 실제로 도움이 되는지, 중 관계에 어떠한 영향력을 끼치고 미국의 목적이 무엇인지 객관적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노력 없이 사드를 배치하게 된다면 미국의 요구를 일방적으로 들어주는 꼴이 되고 자주적이지 않은 수동적인 자세로 외교에 임할 수 밖에 없게 된다.

국방력과 국익 증진이 최우선


국제 외교에서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는 형국을 광해군은 생각건대 우리 나라의 인심이나 병력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어찌하겠소.”(光海君日記」 11 10월 임자)고 말한다. 광해군은 누르하치가 직접 침략할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고 방어대책을 마련한다. 그는 청이 전쟁 시 선보이는 가공할 만한 기마대를 막을 수 있는 전술을 화포로 적을 제압하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화포의 주 원료인 염초(焰硝)’는 명에서만 생산하고 그 제조법을 조선에 알려주지 않아 조선은 염초를 항상 수입해야만 해서 국방을 명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염초의 국내 생산을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사드 또한 염초처럼 국방을 미국에 의존하는 계기가 되어서는 안된다. 현재 주한미군사령관이 가지고 있는 전시작전통제권으로 우리나라의 사드는 유사시 대한민국이 주도적으로 사용할 수 없다. 우리나라가 미중 패권 다툼에서 힘을 발휘하려면 현시점처럼 국방을 미국에 완전히 의존해서는 안 될 것이며 사드 또한 그 목적이 우리나라의 국방력을 강화고 주변국들의 공격으로부터 자주적 방어가 목적이 되어야 한다. 우리나라의 자주 국방력을 증진시키는데 사드가 정말로 필요한 것인지 판단하고 사드 배치를 통해 우리나라가 얻을 국익을 최선으로 고려해야 한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다툼의 중심에 서 있는 대한민국

 

 

 

정확한 의사 표현과 소통을 통한 중립적 외교의 필요성


광해군은 명청전쟁 초반 명의 파병 요청을 거부할 때도 여러가지 국내 상황을 논리정연하게 설명하며 상대방()을 이해시켰고, 이후 파병을 보낸 후에는 명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기보다는 후금에게 사신을 보내어 직접 대화를 통해 난국을 타개하고자 하였다. 즉 광해군은 후금과의 직접 대화에 더 중점을 두었던 것이다.

명청전쟁이 청으로 전세가 기울 때 중립외교는 광해군의 정확한 국제 정세 인식속에서 한번 더 빛난다. 바로 장수적 능력보다는 외교적 능력이 돋보이는 강홍립을 총사령관에 임명하는 것이다. 광해군의 이러한 결정은 청과의 충돌을 최소화한다. 강홍립은 청에게 항복하는 결정적 순간에 우리나라가 너희들과 본래 원수진 일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서로 싸우겠느냐. 지금 여기 들어온 것은 부득이한 것임을 너희 나라에서는 모르느냐.”(光海君日記」 16 11월 임자)는 메시지를 후금 진영에 보내며 패권충돌에 유연한 태도로 피해를 최소화했다.

이는 사드배치 일주일 전까지도 사드 배치를 할 것이냐는 중국의 확인문의에 확답을 주지 않았던 朴 전대통령과 황교안 총리와는 사뭇 대조되는 대목이다. 결국 설치를 할 것이면 사전에 주변국인 중국과 충분한 대화와 설득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운 점이 든다. 사드 배치과정에서 미국과의 일방적 소통은 냉철한 현실 인식도 중립적 외교도 모두 실현하지 못한 현명한 외교라고 보기 어렵다. 광해군이 보여주는 능동적인 실리외교는 현시점에서 우리에게 큰 지혜로 다가올 것이다.

 

참고문헌

계승범, 「조선감호론 문제를 통해 본 광해군대 외교 노선 논쟁『조선시대사학보』34, 조선시대사학

2005.9

한명기, 『광해군 : 탁원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 역사비평사, 2000
신명호, 「광해군의 대후금 외교정책 분석 시대 『
軍事史 硏究叢書. 第2 524(pp.243-300) , 2002

전라도사료집 15 : 선조수정실록, 광해군일기상편; 광해군일기 (태백산본)-광해군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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