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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대한민국 전 세대가 갈망하는 치유의 대중문화, ‘90년대 향수/복고’의 의의

 

     현재 대한민국 사회 구성원들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생존을 위한 처절한 투쟁으로 개인의 고통이 극심하다. 이는 기성세대뿐만 아니라 신세대도 마찬가지이다. 여러 세대가 모인 가정에서는 이로부터 비롯된 치유의 열망에 휩싸이고 이러한 특징은 가족문화로 시작하여 어느새 전반적인 대중문화까지 영향을 끼친다. 이것은 ‘과거의 좋은 시절을 회상하고 떠올리기’를 불러일으켰고 이는 최근 TV에서 ‘응답하라 19○○’ , ‘불후의 명곡’과 같은 1990년대를 재현하는 복고/향수풍의 드라마와 예능의 꾸준한 등장을 야기했다.

 

응답하라 시리즈 (1997, 1994, 1988)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응답하라’ 1997로 시작된 드라마시리즈, ‘나인’과 같은 드라마는 90년대를 회상하게 만드는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젊은 세대를 겨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아비투스(habitous)’라는 개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아비투스(habitous)’란 가족문화와 관련된 개념으로, 어려서부터 가족 모두에게 내재화된 특징을 반복해서 재생하며 새로운 문화를 재생산하는 것을 의미한다. ‘치유’를 원하는 여러 세대가 모인 가족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기성세대는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치유’를 갈망하며 그들만의 향수인 ‘90년대’의 문화를 습관적으로 어린 세대에 반복해서 전했던 것이다. 자연스레 기성세대들로부터 신세대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향수가 어떤 것인지 간접적으로 체감하며 호기심을 갖고 추상적인 느낌으로부터 그 향수의 감정을 구체화한다. 이후 그들 역시 외부사회로부터 얻은 아픔을 치유하기 위한 수단을 90년대 복고풍의 ‘대중문화’로 삼게 된 것이다.

     대중문화는 이처럼 세대 간 다양한 차이를 완화하고 ‘아비투스(habitous)’로 세대적인 동질성을 형성할 수 있으며, ‘90년대’와 같은 특정 과거시점의 대중문화를 재현함으로써 세대 간에 존재 가능성이 있는 균열을 무화한다. 심지어 90년대 복고풍 대중문화가 유행한 시점의 대한민국은 ‘n포세대, ‘유신세대’, ‘88만원 세대’ 등 각 세대들을 의미하는 지칭이 다양했다. 이렇게 심화되는 세대 갈등의 시작점에서 이를 조금이나마 유화시킬 수 있는 대중문화-90년대 향수문화가 유행을 일으킨 것은 앞서 언급한 대중문화의 특징을 잘 드러낸다.

 

90년대 가요계의 돌풍을 일으킨 '서태지와 아이들'

 

     여러 이들은 동시대에 살더라도 세대마다 인식하는 대중문화의 종류와 특징이 다르다고 생각하며, 특정 세대는 다른 세대의 대중문화에 대한 부족한 이해력으로 새로운 갈등이나 문제점을 발생시킨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대중문화의 또 다른 의의는 여러 사회 구성원들의 내재된 공통 감정으로부터 이끌어 세대 간 가치관의 충돌을 막고 감성의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즉, 세대 간 폭넓은 공감이 가능한 새로운 문화를 형성해 나가는 것이다.

     극변한 발전과 변화를 겪은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미루어 보았을 때 90년대 복고풍 대중문화가 인기를 끈 것은 우연이나 기적이라도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대중문화의 긍정적인 기능과 역할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이는 대중문화가 지닌 의미가 실현된 한 가지 좋은 예시이다. 여러 세대가 공존하며 살아가는 현대사회에서 이러한 대중문화는 그 의의로부터 다수 사회구성원들의 공감을 이끌어냄으로써 세대 간 격차를 최소화하고 이해를 극대화하며 그 사회의 문화적 자본의 가치를 키워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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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의 ‘일자리 정책’으로 살펴본 정치적 맥락에서의 세대 갈등

 

     “국민 건강 증진을 위한 예산이 있다면 축구장을 만들겠습니까, 게이트볼장을 만들겠습니까?”라고 물어보면 일본 정치가는 십상팔구 ‘게이트볼장’을 신축하겠다고 한다. 그들은 나라의 스포츠 발전을 위해서는 축구장이 미래 지향적 선택임을 뻔히 알지만, 노인 표심 때문에 이기적 선택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평균 유권자 나이가 예순에 달하는 일본의 정치는 결국 모든 정책이 노인 중심으로 계속해서 편향됐다. 당장의 득실만을 고려한 일본 정치인들의 정책은 마구잡이로 노인 복지 예산을 늘려 국채가 1100조엔에 다다르게 하고 동시에 더욱 심각한 문제인 세대 갈등을 야기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의 일자리 정책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접근할 수 있다.

 

    

일본과 한국의 초고령사회 진입

 

     2000년대 이후 일자리정책 예산을 통한 주 수혜자 중 청년층의 비율은 매우 낮다. 이는 국가가 일자리정책 예산을 주로 저학력 고령자들이 쉽게 접근하도록 계획되어 있는 직접일자리 창출사업에 집중적으로 배정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공공기관은 다수의 ‘질 좋은 일자리를 창출할만한 여건’이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노동 공급의 입장에서 직업 훈련이나 고용서비스와 같은 제도에 예산을 배정하기보다 일자리의 ‘양’만 늘려 청년들의 눈높이를 낮추기 위해서만 노력했다. 결론적으로, 2000년대 청년실업대책은 그 주요 방안이 일자리 공급 수량에 초점을 맞추면서 근본적 해결 방안 요소인 양질의 일자리 창출은 수박 겉핥기식에 머물며 외적으로는 청년 취업난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만, 결과는 노인층의 지지를 얻기 위한 고령자들의 취업률만 높여준 꼴이다.

 

사진출처 : 고학력자 취업난 갈수록 '심각'…전문대 취업률 상승 _ '2013.08.29 mbc 뉴스'

 

     즉, 청년들의 실업률 해결이 주목적이 되어야 할 일자리 정책은 정치적 갈등과 세대 간 불평등을 악화시켰다. 청년과 노년 세대 간 이해관계의 갈등이 점차 심각한 정국으로 이르고 있는 것은 정치인들의 이기적 정책이 세대 간 불평등을 심화시키는데 기인한 바가 크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일자리 정책과 같은 복지 정책의 어려움은 무엇인가. 과거 고도 성장기에 청년정책과 청년복지정책의 필요성은 낮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은 취업전선에 뛰어들거나 대학에 진학했고 결국 직업을 얻었다. 그러나 현재와 같이 경제적으로 장기불황과 실업률이 심각한 상황에서 2~30대는 일정 기간을 가족 또는 개인의 능력에 의존해 버텨야만 한다. 한국사회의 복지프레임은 근로 능력이 없는 장애인과 은퇴 이후의 노인 등에 초점을 맞추면서 새롭게 취약집단으로 부상하고 있는 청년을 적절히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반면, 복지체제를 우선하여 수립한 유럽 선진국들은 70년대부터 발생한 “청년하위계층”의 등장을 통해 사회적 약자로서 그들을 새롭게 인식하고 그에 상응하는 청년정책을 계속해서 수정, 보완해 나갔다. 그러나 아직 복지국가의 형성기에 머무르는 한국은 다수의 취약집단인 노인과 함께 새로운 약자인 청년을 고려해야 하는 어려움에 놓여 있다.

 

근로빈곤 계층 중 청년층의 비율

 

     이런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한 근본적 대안과 정치적 개혁 없이 세대 갈등을 단지 특정 정파의 이익에 악용하려는 세대 정치는 국가적 차원의 세대 갈등을 더욱 심각하게 한다. 저출산 고령화의 상황에서 이런 세대 정치의 결론은 자연스럽게 청년의 패배로 귀결될 확률이 크며 이 경우 ‘3포세대’라는 용어에서 알 수 있듯이 사회재생산이 막히며 장기간 경제 침체의 어려운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

     국가정책은 사회를 통합하고 유지하는 기능을 담당해야 한다. 즉, 사회적 배제집단들을 파악하여 적절히 자원을 배분해야 할 의무와 역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배제된 집단에 대한 공평한 자원 배분을 통해 사회적 갈등을 최소화해야 한다. 한국이 고령화사회에 진입하면서 빈곤 노인에 대한 관심과 정책적 지원은 증가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특정 세대에만 집중적으로 자원을 지원하는 것은 급격한 성장을 이룬 특징을 가진 현재의 한국 사회구조에서 세대 간 균열을 심화한다. 사회통합의 측면에서 특정 세대가 아니라 전 세대에 보편적 복지와 프로그램을 제공한다면 더욱 높은 통합 복지의 성과가 나타날 것이다. 노인복지와 청년복지를 제로섬 관계를 설정하여 자원 배분을 두고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노인과 청년의 복지를 동시에 늘리는 방향으로의 정책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출처 : 기획재정부

세대 갈등을 최소화 할 수 있는 실현 가능한 정책들이 많이 나오기를 기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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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관적인 입장의 글이므로 각자마다 입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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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23, 기독시민단체 샬롬나비는 성적 지향에 대한 기독교적 입장에 근거하여 국가인권위원회법 제23항에서 성적 지향문구 삭제를 강력히 주장했다. 국가 인권위법 제23항에는 평등권 침해의 차별행위를 정의하기 위해서 성별, 종교, 장애 등 피해받을 위험성이 있는 대상을 설정하였는데, 그 중 성적 지향이 동성애 조장을 불러일으킨다는 이유였다. 또한, 성도덕 해이, 국가인권위의 동성애 부정적 보도 통제, 보편적 인권 위배를 예로 들어 인권위법의 성적 지향문구가 반드시 삭제되어야 한다는 의견을 표했다.

대다수의 나라가 차별을 방지하기 위해 인권조례 제정, 인권 교육 등 다양한 활동을 해오고 있고, 우리나라도 매년 1210일 세계인권선언 발표를 기념하여 제정된 인권의 날에는 학교마다 글짓기 등 인권 관련 행사를 꾸준히 개최하고 있다. 하지만, 위의 내용처럼 차별 방지의 대상 중 성적 지향만이 인권위법 개정 이후로 꾸준히 논란이 되어오고 있다. 그러한 의미로, 우리는 사회에게 국내 동성애자 차별에 대한 반응이 다른 대상과 다른지, 아직도 인권개선에 진통을 겪고 있는지, 이에 대한 개선방안은 없는지에 대한 답을 해야 할 것이다.

 

현재까지의 역사를 돌아보면, 동성애자 차별 말고도 다양한 차별이 있었으며, 그 차별에 저항하여 집단의 권리를 얻은 사례도 존재한다. 그 중 대표적인 사례를 들자면 여성, 장애인, 인종차별이 있다. 이러한 차별이 대상이 된 그들은 수많은 시위와 인권선언을 통해 공론화되었고, 법적으로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얻게 되었다. 동성애자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도 예전에 차별받는 사람들처럼 수많은 시위와 인권선언을 하였지만, 사회적으로 다른 차별보다 개선되었다는 정도가 상대적으로 적다.

동성애에 대한 사람들의 부정적인 인식이 생긴 원인은 기독교의 영향이 크다. 기독교도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교리를 내세우고 있지만, 성경에서는 동성애에 대해 가증한 일”, “죽어 마땅한 일이라고 평하였고, 12세기 가톨릭교회에서는 성의 올바른 사용이 아니다.’라는 이유로 동성애를 반자연적 범죄로 규정하였다. 이는 14세기 서유럽에서의 동성애자 화형, ‘자연에 거스르는 육체적 범죄라는 칸트(1724~1804)의 동성애의 정의까지 영향을 미쳤다. 동성 간 성행위는 종을 보존할 수 없으므로 인간성에 상반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은 동성애를 질병으로 규정하기까지 이르렀다. 정신학자 프로이트와 미국 정신과학회는 동성애를 정신질환으로 분류하였고, 정신치료, 행동치료가 시행되었다. 심지어 전기치료, 거세술, 자궁절제술, 뇌 전두엽절제술 까지 시술하여 장애를 교정하고자 하였다. 실제로 동성애자는 이성애자보다 신경적 정신질환에 걸릴 확률이 높다. 성 정체성의 혼란과 이에 대한 비밀을 지키기 위해 생활하면서 불안과 고독감을 느끼고, 심리적 억압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향이 동성애자라는 장애의 증상으로 보였을 것이다. 이렇듯 동성애라는 행위는 중세시대부터 현대까지 성적 특징 중 하나로 존중받기는커녕 범죄와 정신질환으로 취급되었다. 동성애에 대한 부정적 인식만 있었던 사회는 그 구성원들에게 부정적 인식을 그대로 물려주었고, 구성원들의 후손도 무의식적으로 동성애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하게 되었다.

성적 정체성의 차이는 신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지금까지 흔히 언급되는 차별적 특성은 모두 시각적으로 알 수 있는 데 비해, 성적 정체성의 차이는 오직 당사자만이 알 수 있고 온전히 당사자의 생각에 따라 결정되었다. 요즈음은 성전환수술, 재활치료 등 신체적 특성을 바꿀 수 있었지만, 예전에는 그만한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으므로 신체적 특징을 바꿀 수 없었다. 이를 보며 사람들은 억지로 그 특징을 바꾸기보다는 같이 도우며 살아가는 길을 택했다. 성적 정체성의 경우에는, 신체적 특징이 아닌 심리적 특징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러한 심리적 문제를 교정할 수 있다고 믿었다, 표면적으로도 교정으로 인한 부작용이 크지 않았으므로, 그 때 당시 많은 심리학자들은 동성애자를 대상으로 다양한 실험을 해왔다.

TV, 라디오, 신문 등의 대중 매체들은 대중들에게 많이 접하는 만큼 대중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 여러 사회 문제들도 대중매체를 통해 사람들에게 보여지면서 급격하게 공론화된다. 동성애자 및 성 소수자 문제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2000~2001년 사이 배우 홍석천이 자신이 성소수자임을 커밍아웃하고 트렌스젠더 하리수가 광고, 가수 등으로 방송에 뛰어들면서 그러한 문제가 본격화되었다.

현재까지도 홍석천은 다양한 방송 출연 등으로 얼굴을 비추고 있고, 하리수는 최근 이혼소송으로 꾸준히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이외에도 동성애자 영화감독인 김조광수가 있지만, 두 사람에 비해 비교적 최근에 언론의 관심을 받았고, 매체에서 다루는 빈도가 낮다. , 21세기 대한민국의 성 소수자와 동성애자의 표본은 홍석천과 하리수였고, 그들이 대중매체에서 하는 행동이나 말들이 대중에게 전달되어 대중의 성 소수자와 동성애자에 대한 관념을 만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홍석천 하리수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홍석천의 경우 용서와 관용을 구하는 죄인, 여성스러운 호색한으로, 하리수의 경우 출산을 통해 이성 간 결합의 완성을 이룰 수 없는 불완전한 여인으로 대중에게 인식되었다. 이러한 방송 내에서 홍석천의 행동은 동성애가 잘못된 관념이며 반성해야 하는 부정적 존재라는 고정관념을 심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현재까지도 방송에서의 그러한 태도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는 점은 동성애에 대한 고정관념이 현재까지도 계속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그것을 받아들일 만큼 사회가 유동적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커밍아웃 이후 홍석천은 예능, 드라마 등에서 자신의 여성성을 많이 드러내었는데, 이러한 행동도 감성적이고 여성적인 21세기 초반 동성애자의 관념을 고착화했다.

하리수는 성전환이라는 과정으로 남성성을 버리고 여성성을 내세움으로써 트랜스젠더에 대한 부정적인 관념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그러나 방송 내에서 그녀에 대해 과도한 성형수술, 트렌스젠더가 되면서 겪은 일화 등 트렌스젠더의 표면적인 문제들만 드러내는 데 그치면서 기존 트렌스젠더 들의 사회적 문제 등을 제대로 알리지 못했다. TV 프로그램, 뉴스 등에서는 여자보다 더 예쁜 하리수등 은연히 하리수를 여자라는 성과 선을 그어버리는 모습이 보였다. 결국 하리수는 2017년 현재 사회에서 트랜스젠더의 인식에 대한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였고, 자기에 대한 화젯거리가 떨어지면서 가끔씩 근황으로만 얼굴을 비추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동성애자의 차별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이성애자가 가진 동성애자의 편견을 깨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동성애를 반대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동성애와 에이즈를 연관시킨다. 동성애가 법적으로 허용되면 동성애자 간의 유사성행위로 우리나라 전체에 에이즈 바이러스가 퍼진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이는 단지 에이즈에 대한 편견일 뿐이다. 우리나라에 처음 에이즈가 알려졌을 때 마약 중독자, 동성애자 등 특정 집단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에이즈는 동성애자의 병이라는 인식이 퍼졌고, 에이즈 감염자와 동성애자를 같게 취급하여 사회에 격리하고자 하는 동기가 작용한 것이다. (에이즈 감염자에 대한 사회적 격리감에 대한 연구)

또한, 에이즈를 감염시킬 수 있는 체액은 감염인의 혈액, 정액, 질 분비액, 모유밖에 존재하지 않으며, 공기에 노출될 시 24시간 이내에 활성을 잃는다. 에이즈는 이성애자 동성애자 관계없이 일어나는 질병이며, 동성애 간 성관계에도 에이즈가 번질 수는 있지만 콘돔 등 간단한 방법으로 예방 가능하다. 동성 간 성행위로 에이즈에 걸렸을 경우 당사자의 부주의 때문이지, 성행위 자체가 에이즈를 유발하는 것은 아니다.

동성애자는 단지 자신과 같은 성을 가진 사람에게 성적 지향을 가지는 사람일 뿐, 나머지는 이성애자들과 같다. 그런데도 이러한 차별이 일어나는 것은 그만큼 동성애자에 대한 편견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편견을 없애기 위해서는 어릴 적 때부터 동성애자에 대한 바른 인식을 심어주는 것이 필요하다. 학교에서 필수적으로 시행되는 성교육 시간에 성 소수자에 대해서도 교육을 하여 학생들이 성 소수자에 대해 느낄 수 있는 여러 편견을 버리고 같이 어울리는 자세를 기르도록 해야 할 것이다.

 

동성애자들도 이성애자들이 먼저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닌, 예상치 못한 동성애자의 반감을 형성하는 행위도 최대한 줄여야 할 것이다. 특히 가장 논란이 되는 문제가 퀴어문화축제이다. 2000년부터 18년 동안 지속한 이 축제는 한국 내 성소수자의 자긍심 고취, 일반인들의 성 소수자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시행되고 있다. 퀴어문화축제 참여자들은 페스티벌 내 공연, 파티, 영화제, 사진전, 퍼레이드를 통해 인권 이슈를 문화의 장으로 유도하고 이성애자 간의 화합을 표하여 공공성과 다양성을 모두 추구하고자 한다. 그러나 매년 퍼레이드에서 과도한 노출로 인해 몇몇 사람들이 불편함을 호소하는 경우가 생긴다. 이에 찬성하는 측은 사회에 저항하는 퍼포먼스로서, 규제할 경우 대회의 주요 목적인 저항의 의미가 상실된다는 의견을 내고 있다. 지난 페스티벌 퍼레이드에서 알몸 차림으로 나간 사람이 경범죄로 기소되고, 퀴어문화축제에 반대하는 시민단체들의 주요 이유 중 하나가 과도한 노출이니만큼 어느 정도 규제가 필요하다. 과도한 노출은 대중들에게 혐오와 잘못된 고정관념을 심어지게 하고, 그만큼 참가인원이 줄어들어 영향력이 작아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과도한 노출 없이도 얼마든지 지금껏 성 소수자로서 받은 불편함을 호소하고 성소수자 인권 존속을 주장할 수 있다. 대중 간의 거부감이 적어질수록, 동성애뿐 아니라 성 소수자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을 지니는 사람이 적어지고, 퀴어문화축제의 진정한 의미를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늘어날 것이다.

 

앞의 글에서 볼 수 있듯, 동성애자는 성적 지향의 대상이 다를 뿐, 나머지는 이성애자와 다른 점이 없다. 같은 숨을 쉬고, 같은 잠을 자고, 같은 밥을 먹으며 생활한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우리나라 사회에서 그들은 자신의 정체성이 들킬까 봐 전전긍긍하며 생활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고백한 후, 서로 간의 불편함이 싹튼다. 이성의 야한 사진을 보여주기, 노래방 도우미 부르기 등 배려란 명목으로 끊임없이 이성애자로 살기를 권유하고, 동성애자를 변태성욕자로 묘사한 영상을 보며 너도 그러는 거 아니지?”라는 질문을 한다. 이러한 행위는 당사자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단지 동성애자와 이성애자 사이의 벽만 키울 뿐이다. 지금까지, 이성애자가 메이저였던 사회는 소수인 동성애자에게 너무 많은 편견을 갖고 동성애가 비정상적인 것이라고 말해왔다. 동성애자의 고정적인 모습을 희화화하면서 정작 동성애자가 겪는 불편함과 고통에 대해 공개적으로 토론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되지 못했다. 잘못된 인식 때문에 동성애자가 과도한 불안, 고독으로 고통받을 때, 사회는 이를 원죄와 정신질환으로 규정하여 더욱 큰 심리적 고통을 주었다, 우리는 두 부류 모두 서로 간의 편견을 풀며 화합하며, 동성애자에 나아가지 않고 트랜스젠더, 양성애자 등 성 소수자로 범위를 넓혀 존중하는 것이 좋겠다.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자신의 성 정체성을 드러내도 어떠한 불이익이나 압박이 없고,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한 자신의 결정을 존중하는 사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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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der Inequality and Patriarchal Order Reexamined, Cho Uhn



<조은 교수>


  이 논문은 현대 한국 사회의 불평등 문제에 대해 논하고 있다. 저자는 크게 가부장제가 gender inequality 미친 영향, 급격한 산업화, IMF 금융위기 한국의 특수한 역사 속에서 생겨난 Gender Inequality 대한 인식의 변화라는 가지 관점에서 불평등을 논하고 있다. 특히나 논문은 내부의 문제를 통해 한국의 gender inequality 분석해보고자 했다는 것에 의의를 있다.


 우선적으로 논문의 초반 부분에는, gender inequality 노동분야에서도 나타난다는 것을 통계를 통해 제시해주고 있다.  통계에 따르면, 아직까지도 25~29 구간을 제외한 여성의 육아와 가사 노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구간 전체에서 남성(74.2%) 비해 여성의 노동참여율(LFP) 낮은 수치(48.6%) 유지되고 있다. 심지어 고위직 여성 비율은 5%대밖에 되지 않는 더욱 심각한 편이고, 여성이 불안정적이며 일시적인 직종에 많이 종사하다 보니 임금 자체만으로도 남성과의 격차가 꽤나 벌어져 있다.


<출처 아시아 경제>

이후 저자는 가지의 역사적 사건과 가부장제를 곁들여 한국 사회에서의 gender inequality 설명하며, 가지 argument 제시했다. 첫번째 argument IMF 시기를 거치면서 강화된 가부장제적 질서가 불평등을 야기했다는 것이다. 1960~80년대 우리나라는 농업에서 제조업으로 산업 선도 직종이 변화했다. 시기에 농촌 지역의 가부장적인 분위기와 값싼 노동력의 필요로 인하여 여성 노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시기에는 여성 노동이 양적으로는 증가하였지만, 낮은 여성 임금 등에 대한 시위는 쉽사리 이루어지지 못하는 , 권리가 보장되지 못하는 낮은 처우의 노동이었다. 이런 상황이 IMF 시기를 거치면서 남성 노동이 가족임금이라는 가부장적인 인식 증가와 맞물리며, 임산부가 해고 1순위, 기혼 여성이 해고 2순위로 꼽히게 되는 여성근로자들의 권리는 바닥까지 떨어지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저자는 유동성 있는 세계 금융 자본이 가부장제와 협력하여 한국의 labor gender inequality 만들어냈다고 주장하고 있다.

번째 argument 또한 위의 역사적 상황과 관련이 있다. 남성 생계 수단과 여성과 주부를 동일시 하는 경향성은 경제 위기에 의해 증대되고 합법화되었다. 산업화 시기에 만들어진 노동조합마저도 남성이 지배하는 구조이다 보니 여성 근로자들의 정리 해고에 일정 이상 동의를 하였고, 여성 근로자들의 권리를 신장을 외치는 목소리는 그렇게 크지 않아 정리 해고에 맞서기 힘들었다. 이로 인하여 여성들은 외부 노동보다는 가사 노동에 필요한 존재라는 가부장적인 인식이 심화되었고, 여성의 우선적 해고가 당연시 여겨지기까지 했다는 점에서 gender inequality 영향을 끼쳤다고 평했다.

마지막 argument 경우 호주제와 관련된 것이다. Hojuje has also contributed to fortifying the maintenance of gender inequality. 호주제는 남녀가 법적으로 평등함에도 불구하고 남성이 여성보다 집안의 가장을 정할 우선순위가 된다는 부분에서 문제가 되어 2005 폐지된 법이다. 호주제는 남아선호사상과 함께 가부장적 사회 질서를 법적으로 지지한다는 측면에서 gender inequality 현상 유지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끝으로 저자는 이런 역사적 상황을 통해 굳어진 가부장적 사회 질서를 바꾸기 위해서는 호주제 폐지 등의 사회에 대한 정치적 개입이 필요함을 이야기했다. 2005 실제로 호주제가 폐지되었고, 어느정도 필자의 주장이 gender inequality 해소에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아직까지 성차별이 존재한다고는 생각하지만, 10~ 20대의 경우 40~ 50대처럼 가부장적이지는 않아 점차 gender inequality가 줄어들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최근 SNS를 통해 여성혐오에 대한 열띤 논쟁을 펼치는 것을 보면서 아직까지 남성과 여성이 절대적으로 동등하지는 않다는 것을 느꼈다.

 그 토론에서 여성은 강남역 사건을 빗대어 여성에 대한 남성의 폭력적인 인식을 비판하기도 하고, 아직까지도 여전한 가부장적 제도에 의한 사회 여러 방면에서의 성차별(깨지지 않는 유리천장, 여성 국회의원 비율 17% )을 제시하며 남성을 비판했다. 이에 대해 남성은 여성 고용 할당제로 인한 역차별과 더불어 국방의 의무가 남성에게만 있다는 점, 남성을 범죄자로 취급해버리는 인식을 문제 삼는 것을 보았다.

더불어 -페미니스트(like 메갈리아, 워마드) 등장은 나에게 gender inequality 대한 남성과 여성의 관점 차이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한국의 불평등이 어떻게 야기되었고, 과거와 현재의 성불평등 현상의 형태가 어떻게 변화하였는지에 대해 관심을 갖고 논문을 접하게 되었다. 논문이 2004년에 만들어진 것이라 현재의 gender inequality 현상을 설명하기에는 조금 부족한 부분이 있지만, 특히 노동 분야의 gender inequality 생성과정에 대해 생각할 있었다는 점이 소득이었다고 생각한다.

최근 들어 다양한 평등 정책과 교육이 시행되며, 점차 성차별에 대한 깨어있는 의식을 가진 사람이 많아지고 있는 만큼, 나도 필자의 주장처럼 양성평등에 대한 정치 개입은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페미니스트 대통령을 지향하는 문재인이 대통령에 당선된 만큼, 나은 양성평등 정책이 나올 것이라는 바람을 갖고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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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화지에 데칼코마니만 찍기에는 너무 아깝지 않은가


-나의 삼촌 브루스 리(천명관 저),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장영희 저)-

 

 한번 주위를 둘러보자. 같은 사회에 속해 있는 우리, 그러니까 우리라는 단어 안에 속해있는 사람들에게서는 대개 동질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매일 비슷한 시간에 일어나 비슷한 아침밥을 먹고, 또 비슷한 일을 하며 비슷하게 휴식을 가지며 살고 있다. 특히 학생들의 경우에는 더하다. 같은 학교에 같은 시간에 등교해서, 같은 수업을 지루하게 듣고, 또 점심 식사를 하고, 같이 공부를 조금 더하다가 자율학습을 하고, 같은 시간에 집이나 기숙사로 돌아간다. 물론 사이사이에 각자 다른 것들도 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이렇게 매일 비슷한 상황과 마주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같은 상황에 놓인 우리들의 얼굴 표정은 전부 같지만은 않다. 아침밥을 먹을 때를 생각해보자. ‘우와 이 떡갈비 맛있다면서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먹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맛있는 떡갈비는 안중에도 없이 엄마가 깨워서 억지로 밥을 먹으며 잠을 더 자고 싶어서 찌푸린 표정을 짓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왜 같은 상황에 놓여있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는 걸까?

 

 행복을 추구하는 행위 자체는 인간의 본성이라고 할 만큼 근원적인 욕구이고, 누구나 그 욕구대로 행복을 갈망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우리가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처럼, 모두가 똑같은 행복을 갈망하지는 않는다. 각자 생각도 다르고, 자신 스스로가 만족을 느끼는 부분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들어서 우리가 갈망하는 행복의 의미가 조금 달라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분명 행복을 추구하고 있는 것 같은데, 뭔가 진정으로 행복하지 않은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생기는 것 같다. 행복을 추구하는데 행복하지 않은 삶을 산다는 것이 상당히 모순적이다.

 

그에 대한 이런 저런 이유를 생각해보다 보니 남과 다른 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우리나라의 사회 풍토가 문득 떠올랐다. 아직까지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장애인들이나 성소수자들과 같은 나와는 다른 사회적 약자에 대한 멸시적인 시선을 보내고, 타인에 대한 경계적인 시선으로 남들과 조금 다른 행동들에 대해 간섭하며 쟤 왜 저래라는 말을 먼저 하곤 한다. 이런 것처럼 우리가 행복을 추구할 때, 타인의 다름은 무시한 채 우리사회가 절대적인 행복이 있는 것처럼 여기고, 개인이 각자 행복을 추구하는 것에 대해 은연중에 제약을 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라는 장영희 교수님의 책 속의 여러 구절에서 책을 가까이 하라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 자신이 겪었던 여러 가지 예시를 들고 있다. 먼저 ‘After a while’이라는 시를 소개하며 학생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적어 놓은 부분에서는 ‘After a while’이라는 시가 여학생들이 공부는 대충하고 결혼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을 바꿀 수 있는 시라서 한 번쯤은 그런 여학생들에게 권해주고 싶다고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다른 파트에서는 이런 말도 한다. 명품 백을 수집하는 사람들에게 왜 명품 백을 사느냐고 물어봤더니 다른 사람들이 쳐다보는 눈이 좋아서 그랬다고 대답을 했다. 그런데 그 대답을 듣고 장영희 교수님은 자기가 놀랐다며 오히려 그 가방안의 내용물의 중요한 것이 아닌가에 대해 이야기를 하시며 책이 좋은 예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교수님이 얘기한 말들은 사실 그냥 보기에는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교수님이 앞서 이야기한 내용들을 맞는 것 같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예시는 나에게 약간의 불편함을 가져다주었다. 물론 나도 학생들이 좀 더 나은 길로 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은 교수님의 의도를 잘 알고 있고, 책을 읽는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지에 대해 알고 있으며 동의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은 이에 대해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책을 보는 대신에 명품 가방을 사서 매고 다니는 것을 통해 책을 읽음으로써의 행복보다 더 큰 행복을 느낄지도 모른다. 앞서 말했듯이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가는데, 자신이 당장의 행복에 대해 만족감을 느끼고 살아간다면 그것으로 된 것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미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자기가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아는 사람들의 행동에 대해 우리가 독서를 조금 안한다고 뭐라고 왈가왈부할 수 있을까.

 

행복이란 그런 것이다. 물론 세상은 사회적 분위기를 통해 성공하면, 남들이 부러워할 정도가 되면 넌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다’, ‘독서를 통해 마음의 양식을 가꾸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고 주입을 하곤 한다. 하지만 자신이 진정으로 행복하다는 느낌을 받을 때는 사회가 주입한 절대적인 성공을 이루어냈을 때가 아니라 무언가 부족하더라도 자신이 만족할 정도가 되었을 때라는 것이다.

 

 나는 절대적인 행복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자신에 처해진 자신의 상황에 맞게 행복을 다시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세상이라는 곳은 너무나도 상대적인 공간이기 때문이다. 똑같은 수학시험을 친 상황을 생각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몇몇 학생들은 점수를 잘 받았을 것이고, 또 몇몇의 학생들은 눈물을 머금게 하는 점수를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앞자리 수가 5가 되지 않는 점수를 받았다고 해서 그 사람이 이 시험을 치고 행복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또 절대적인 점수로 봤을 때 시험을 잘 쳤다고 볼 수 있는 사람이 전부 행복을 느끼지도 않는다. 자신이 원하던 점수에 다다르지 못해 못내 아쉬워하며 만족하지 않을 수도 있다. 행복이란 그런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만족스럽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내가 아니면 말짱 도루묵인 것이다.

 

 ‘나의 삼촌 브루스 리’(천명관 저)에서 삼촌은 평소 이소룡을 동경했었다. 그래서 혼자 무술을 익히고, 자신이 제 2의 이소룡이 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때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홍콩에서 이소룡과 비슷한 사람을 선발하는 오디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삼촌은 엄청나게 가고 싶어 했지만, 금전적인 문제로 인해 꿈을 꺾을 위기에 처해졌다. 그 때 구세주가 나타났다. 바로 마 사장이다. 마 사장은 삼촌의 꿈을 지원해 주기위해 홍콩행 밀항을 주선해 주어 이소룡 오디션에 참가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그런데 절호의 기회임에도 실패를 두려워하던 삼촌이 망설이자 이런 말을 했다.

 

 “난 중국 사람도 아니고 한국 사람도 아냐, 여자도 아니고 남자도 아니지. 생긴 건 여자지만 남자의 일을 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더 이상 젊지도 않지만 아직 늙은이는 아냐. 그게 바로 지금의 내 인생인데, 그럼 도대체 난 뭐지?”

 

 이 말은 삼촌이 현재 우리 사회 대부분의 사람들과 같은 처지에 놓여 있지만 우리들과는 다른 길을 걸어갈 수 있는 큰 원동력이 되었다. 이소룡이 되는 것. 분명 어렵고 험난한 길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좋아했던 이소룡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왔다. 결국 이소룡 오디션에 참가하지 못하고 안 좋은 일에 휘말리게 되어 안타깝게도 동경하던 이소룡이 되는 것에 실패하고, 아류 액션배우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촌은 자신의 꿈을 좇던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살아갔다. 나는 삼촌의 삶의 태도에서 우리나라 최근 사회 이슈 중 하나인 금수저 흙수저 론이 떠올랐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사회구조 탓에 노력해도 되지 않는 것을 하는 청년기의 시간을 보내는 것을 불행하다고 이야기한다. 사회적 문제로 인해 빈부격차가 심화되며 그들과의 비교를 통해 상대적 박탈감이 심해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우리가 불행하다고 여기는 그 시간들에서 진정으로 행복을 느낄 수 없는 것일까. 그냥 우리가 남과 비교하며 나는 불행하다고 쉽기 치부해 버린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삼촌의 영원한 우상인 이소룡은 산다는 것은 그저 순전히 사는 것이지 무엇을 위해 사는 건 아니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이소룡의 이 말처럼 순전히 그냥 내 인생을 사는데 절대적인 행복이라는 가치를 들이밀며 남과 비교하며 살기는 너무 피곤한 일이 아닐까. 남들 보기에는 조금 부족해 보이고 그럴지 몰라도 그냥 내가 만족하는 삶을 살면 그 자체로도 충분히 행복하다고 여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하이얀 도화지에 자신이 마음에 드는 색깔을 칠해 넣어 충분히 자신이 만족하는 멋있는 작품을 만들 수 있다. 많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도화지에 굳이 데칼코마니를 찍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것이 바로 모두가 똑같은 삶을 살고, 똑같은 행복을 얻을 수는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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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다홍빛하늘입니다. 오늘은 질량보존의 법칙과 실험에서의 한계시약 찾기, 화학식 찾기 등의 내용을 담은 실험 레포트로 찾아 뵙네요.  이 실험에서는 NaHCO3 + CH3COOH->CH3COONa +CO2+H2O 이 반응식을 통하여 나오는 CO2의 부피를 살펴보며 theoretical amount가 어느지점인지 추측하고, 실제와 같은지를 확인해볼 수 있습니다. 레포트의 저작권은 다홍빛하늘에게 있으며, 불펌 및 무단 공유를 일체 금함을 알려드립니다. 참고는 괜찮습니다. 참고하셨다면 댓글 달아주시면 더욱 좋구요 :)




1. Introduction

Complete sentences summarizing purpose of experiment. These sentences should include clear explanation both concepts and techniques.

 This experiment was designed for conservation of mass and limit reagent identification. Its chemical reaction formula is NaHCO3 + CH3COOH->CH3COONa +CO2+H2O, At part 1, we measured about limit reactant of each reactions. Also we measured starting mass and ending mass to identify weather the law of conservation of mass is established. And part 2, we measured mass of CO2(Actual yield) to compare with theoretical yield. Finally we can take % yield in this chemical reaction.DY

 

 

 

2. Experimental 

The procedure section should reference the lab manual and describe how you did your experiment and include any changes made to the procedure during the lab.

 

Part 1 <Law of conservation of mass & Limiting reagent>

1. Weigh and set six amounts of baking soda.

2. Put the six different masses of baking soda into six balloons using a small plastic funnel. Make sure the baking soda locates to the bottom of the balloon.

3. Using the pipette to accurately measure and transfer to put 20.0mL vinegar (6% acetic acid, CH3COOH) into each flask.

4. Weigh the flask and Record total mass of all objects.

5. Attach the filled balloons to the mouth of the flasks. Ensure that the substance in the balloon and flask are not mixed.

6. Lift balloons to the flasks so that the contents of the balloon mix with the flasks contents simultaneously for the simultaneous progress of the reaction. (Do not let any gas escape from the system that you set up and be careful not to remain NaHCO3 powder in balloons.)

7. Observe the size of the balloons after the reactions. Measure the diameter of each balloon.

8. Record your observations for each flask and weight all objects carefully.

 

Part 2 <Actual and theoretical yields>

1. Weigh 2 g of baking soda and record the mass.

2. Prepare 100 mL erlenmeyer flask and measure the 20 mL of 1.00 M vinegar.

3. Deliver the vinegar to flask and weigh the mass of flask and 20 mL of 1.00 M vinegar.

4. Pour the NaHCO3 powder to beaker. When the bubbling finished, stir the solution in the beaker to make the reaction complete and remove the bubbles made by CO2.

5. Weigh the beaker containing the solution and record the mass. 

6. Repeat the experiment two times using 20 mL acetic acid (vinegar) and 2 g of baking powder.

7. Using these data, we compare to theoretical yield and actual yield. And calculate percentage yield.

 

3. Results 

Part : Post lab calculations: complete the table with your lab data.

1) Find the number of moles of baking soda used in each reaction.

2) Decide which chemical is the limiting reagent in each flask reaction

3) Decide how many moles of carbon dioxide were produced in each flask.

Flask #

1

2

3

4

5

6

Mass of

NaHCO3

0.50g

1.00g

1.70g

2.00g

2.50g

2.70g

Moles of

NaHCO3(mol)

6.0*10-3

1.19*10-2

2.02*10-2

2.38*10-2

2.98*10-2

3.21*10-2

Moles of acetic

acid

20.0 mL 1.00 M = 2.0 10-2 moles

Name of the Limiting

NaHCO3

NaHCO3

Theoretical amount(but exactly, Acetic Acid)

Acetic Acid

Acetic Acid

Acetic Acid

Moles of CO2 produced?(mol)

6.0*10-3

1.19*10-2

2.0*10-2

2.0*10-2

2.0*10-2

2.0*10-2

 

 


 

 

part: Calculate the % yield 

 

Trial 1

Trial 2

Trial 3

Actual yields

0.83g

0.88g

0.87g

Theoretical yield

0.88g

Percent yields

94%

100%

99%

Average percent yields

98%

 

 

4. Discussion & Conclusion

1) Part : Record your results on the data table. How did your result support or violated the Law of Conservation of Mass? Did this lab prove the law of conservation of mass? Explain & use data to support your answer. 

Flask #

1

2

3

4

5

6

Amount changed (g);

Starting mass(g) - Ending mass(g)

0.13g

0.24g

0.47g

0.47g

0.46g

0.50g

Mass of CO2 produced?

(Molecular mass CO2:44.01g/mol)

0.261g

0.524g

0.880g

0.880g

0.880g

0.880g

 

Said to be frankly, based on this experiment alone, that violated the Law of Conservation of Mass because of gap between starting mass and ending mass. But whole mass of that experiments are more than 70g, so this amount changes are small enough to be ignored. So that results of the experiment does not violate the law of conservation of mass.

 

2) What are the sources of error in the experiment? (List all possible errors found in this experiment.)

      Part

Mass gap between starting mass and ending mass is due to the leakage of generated CO2 gas. The reason came to think of this is because the mass of the CO2 generated and the corresponding error have a similar relationship. Maybe It is caused by pressure of CO2. This is because the error value from the point where the mass of the product is equal is almost constant, and the error value increases as the amount of the product increases.

 We have considered whether the remaining baking powder in the balloon affects it, but we have concluded that the law of conservation of mass does not affect the mass value as the amount of product is small.

      Part

  It is expected that there will be spilled powder until it is put into vinegar after measurement. Since the mole number of acetic acid in the vinegar is smaller than the mole number of NaHCO3, NaHCO3 is left to be left even if it reacts. Therefore, we can suppose that acetic acid in vinegar is less than 2.0*10-2 mol.

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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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과학 논쟁(강윤재) 서평&독후감





이 책을 읽던 중 "13 여성과 과학의 거리두기 : 누구의 책임인가?-과학과 젠더"를 읽고 저자의 주장을 반박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이슈화 된 페미니즘과도 관련되어 있는 이 목차의 내용에서 저자느 남성과 여성을 단지 이분화하여 여성 과학자들의 사회적 어려움을 호소한다. 물론 객관적 통계자료에 있어서 여성 과학자들의 참여 비율이 상당히 저조하다는 것을 파악하고 있어 여성 과학자들에 대한 지원과 사회적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여성 과학자들의 연구 방법을 남성 과학자의 그것과는 다르게 접근하여 새로운 과학하기(science doing)으로 정의하는 것은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성의 이분화라고 밖에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러한 시각에 입각하여 필자는 다음과 같은 독후감을 써보았다.

혹시 책을 읽지 않는 분들을 위하여 책의 내용을 최대한 언급하지 않도록 노력했다. 혹시나 독후감을 읽고 페미니즘이나 여성 과학에 관심 있으신 분들은 본 책 목차 13번을 꼭 읽어보시는 것을 추천드린다.




과학적 객관성에서 여성 중심적 과학의 의미와 그 이해

    저자는 과학계에서 여성 과학자의 저조한 수적 비율과 영향력이 기존 과학의 남성 중심적 관념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며 ‘맥클린톡’과 ‘수정이론’의 사례를 들어 여성 중심적 과학을 통해 과학이 좀 더 객관성을 가지고 발전할 수 있다고 전망한다. 나는 저자가 제시한 두 가지 예시를 보며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과 ‘태양계에서의 명왕성 퇴출 사건’이 각각 떠올랐고 이 사례들을 통해 여성 중심적 과학의 의미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맥클린톡의 튀는 유전자’와 마찬가지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당시 과학자들의 반발을 샀다. 그 주요 원인은 연구 결과의 이론적 근거가 되는 두 과학자의 과학하기(science doing)가 기존 과학계의 상식과 완전히 다른 식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먼저 맥클린톡은 기존 생물학 연구와 달리 연구 대상과의 관계맺기와 교감을 기반으로 연구를 진행하였으며, 코페르니쿠스는 천동설의 기본 모델인 복잡한 주전원에 의심을 품고 천문학 연구의 정석인 관측 과정 없이 행성의 운동을 단순한 원운동 모델로 그린 후 이를 이론적으로 증명해보며 지동설을 확립해나갔다. 나는 여기서 두 과학자가 당시 보편적이고 통념화된 과학하기와 차별되는 그것으로 연구를 진행하여 기존 과학적 이론과 이질적인 의견을 제시했다는 점에 주목하려 한다. 튀는 유전자와 지동설 모두 현재는 과학적으로 인정받는 사실이지만 당시 두 의견은 단지 당시 정설과 차이를 보이고 특히 연구 방법에 있어서 상당히 획기적이었기에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며 상당히 비과학적으로 생각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만약 맥클린톡이 여성 과학자가 아니고 남성 과학자라고 하더라도 그 연구 방법은 생물학계에서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거로 생각한다. 저자의 주장처럼 맥클린톡이 여성 과학자라는 특성을 가지고 새로운 과학하기를 창안해내어 그것을 남성 과학자들이 받아들이지 못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처럼 남성 과학자가 기존의 연구 방법과 다른 과학하기로 연구를 진행하더라고 이것이 받아들여지기는 쉽지 않았다는 사실을 과학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즉 나는 여성 중심적 과학의 의미를 기존의 과학계가 인정하는 과학적 접근과 차이가 있는 과학하기에 둘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성 중심적 과학이 오직 여성적 사고방식이라서 제대로 존중받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코페르니쿠스의 연구 방법처럼 그녀들의 과학하기가 기존 과학계의 상식과는 너무 차이가 나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점에서 활성화되지 못했다고 보는 게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글에서 예시로 든 수정이론은 꾸준히 개정되는 과학이론의 특성에 입각할 필요가 있다. 본문을 읽고 수정이론의 변화가 여성 중심적 과학하기를 통해 객관성을 찾아가는 과정이라 볼 수 있지만 이보다는 ‘태양계의 명왕성 제외’처럼 여러 과학자가 고민함으로써 가장 정확하고 객관적인 과학에 접근하는 한 과정이라고 봐야 한다. 수정이론의 변화를 남성 중심적 과학에 여성 중심적 과학이 유입되어 올바른 수정이론을 확립했다는 식으로 이분화하여 보기보다 정설로 여겨지던 이론에 이의를 제기하는 새로운 연구 결과가 나왔다는 식으로 이해해야 한다.

     나는 여성 중심적 과학을 ‘여성’에 초점 맞추지 말고 여성 과학자가 만든 ‘새로운’ 방법의 과학하기라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성 구별 없이 특별한 의견과 방법을 제시하는 과학자를 허투루 넘기지 말고 일일이 그 타당성을 따져보며 존중하는 것이 과학의 객관성 확보에 가장 필수적인 요소라고 생각한다. 과학자들의 새로운 의견을 진심으로 존중하며 무한히 수정되는 과학의 본질을 이해할 때 인류의 과학은 확실한 객관성을 가지고 정답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by 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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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과학의 눈부신 발달이 새로운 사회윤리를 요구하고 있다. 바야흐로 인간 유전체(genome)가 거의 그 전모를 드러냈고, 양에서 출발한 체세포 복제가 급기야 원숭이에 이르렀다. 인간 유전체의 염기서열을 밝힌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과학적 개가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 유전체에서 어느 유전자가 어디에 앉아 있느냐는 배치도를 그린 것에 불과하다. 왜 그 유전자가 그곳에 있게 되었는지, 무슨 일에 관여하는지 등을 밝히려면 앞으로도 몇 십 또는 몇 백 년이 더 걸릴 것이다.

          요즘 우리 사회는 인간 배아 연구를 허용할 것인가, 허용한다면 어디까지 할 것인가를 놓고 뜨거운 논란을 거듭한 끝에 급기야 2001 5, 과학기술부 생명윤리자문위원회가 생명윤리기본법(가칭) 기본 골격안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면서 생명과학의 발전을 꾀해야 한다는 두 마리 토끼를 쫓아야 하는 어려움을 안고 있었던 이 법안이 배아 복제 연구를 사실상 원천적으로 금지함으로써 논란이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이 논란의 한가운데에는 수정 후 14일 기존이라는 웃지 못 할 쟁점이 있다. 수정이 된 지 14일을 전후하여 인간 배아는 이른바 원시선(primitive streak)이라는 형태를 갖추는데, 이곳으로부터 모든 기관들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그 이전의 세포덩어리와는 구별해야 한다는 주장과 수정란부터 생명을 지닌 인간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그러나 14일 기준에 과학적인 객관성을 부여하기는 사실 어렵다. 14일이란 시각도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를 수 있고 기관이 만들어지는 시각이 가져야 할 중요성이 그리 특별날 이유도 따로 없다. 수정란을 생명체로 간주하는 견해는 더욱 큰 문제를 안고 있다. 이번에 발표된 생명윤리기본법은 구정이 되는 순간부터 인간의 생명이 시작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수정란에 생명을 부여한다는 것은 수정란도 성체와 똑같이 보호해야 한다는 윤리적 당위성을 수반하기 때문에 그 과급 영향이 자뭇 크다.

          이 같은 결정에는 과학적으로 피할 수 없는 모순이 도사리고 있다. 인간의 경우 임신의 거의 80%가 이런저런 이유로 산모의 몸 속에서 자연 유산이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렇다면 여성들의 절대 다수는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생명체를 죽이는 살인자가 되는 셈이다. 수정란이나 초기 배아를 중시하자는 의견들은 다 생명 경시 풍조를 지적하는데, 비록 모르고 저지르는 일이기는 하지만 엄연한 살인이 되는 걸 어찌하랴. 그것도 자기 자식의 생명을 죽이는 일인데.

          새들을 비롯한 지구 상의 거의 모든 동물들은 수정란을 몸속에 품지 않는다. 물고기나 개구리들은 아예 수정도 몸 밖에서 하지만 체내 수정을 하는 새들도 수정이 되기 무섭게 알을 몸 밖으로 내놓는다. 둥지에 놓여 있는 알을 과연 생명체로 봐야 할 것인가. 그렇다면 오리 알을 날것으로 들이마실 때 한 생명체를 통째로 그것도 산 채로 삼키는 셈이 된다.


생명, 생명체 그리고 유전자

          ‘생명의 시작을 얘기하려면 어쩔 수 없이 유전자로 환원할 수밖에 없다. 어차피 생명체란 유전자가 더 많은 유전자를 만들기 위해 만들어낸 매개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생명체란 유전자의 정보에 따라 만들어져 이 세상에 태어나 일정한 시간을 보내곤 허무하게 사라지는 존재이지만 유전자는 시대를 거듭하며 살아남는다. 생명의 역사는 한마디로 DNA라는 기막히게 성공적인 화학물질의 일대기에 지나지 않는다. 생명은 이처럼 한 생명체의 탄생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태초부터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온 DNA의 표현일 뿐이다.

          그렇다면 생명체의 시작은 과연 어디인가. 생명체, 즉 스스로 숨 쉬고 번식하는 독립적인 실체의 시작 말이다. 일란성 쌍둥이의 경우에는 하나의 수정란이 포도송이와 같은 세포덩어리가 되었다가 무슨 이유에선지 둘로 갈린 후 완벽하게 정상적인 두 개체로 성장한다. 하나의 수저안이 세포덩어리가 되기 이전의 그들을 과연 두 생명체로 봐야 할 지 아니면 아직은 하나의 생명체로 봐야 할지 참 애매한 일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배아는 완전한 생명체로 보기 어렵다.

          배아는 유전자가 생명체를 만들어내는 중간 과정일 뿐이다. 다시 말하면 유전자가 생명 현상을 독립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을 만들어주고 그 몸이 의식을 얻어야 비로소 하나의 생명체가 탄생한다고 봐야 한다. 인간은 특별히 완전하지 않은 신경계를 가지고 태어나는 동물이다. 그래서 만일 신경계가 자의식을 확립하여 하나의 완벽한 양혼으로 거듭나는 시기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면, 어머니의 몸을 빠져나와서도 한참이 지난 후이다.

          이처럼 생명체의 시작을 논한다는 것은 공허한 일이다. 생명은 연속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생명의 시작은 DNA의 탄생과 때를 같이한다. 그 태초의 바다에 떠다니던 많은 화학 물질들 중에 어느 날 우연하게도 자기 자신을 복제할 줄 아는 묘한 화학물질인 DNA가 나타나 지금에 이르기까지 수십억 년 동안 다양한 들을 만들며 살아온 것이 바로 생명의 역사다. 지금은 비록 인간의 몸속에, 그리고 개미와 은행나무의 몸속에 들어앉아 있지만, 그 모든 DNA는 전부 하나의 조상 DNA로부터 분화한 자손들이다.

          이런 점에서 생명이란 하나의 생명체의 관점에서 볼 때 분명히 한계성(ephemerality)을 지니지만, DNA의 눈으로 보면 태초부터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온 영속성(perpetuity)을 지닌다. 무성생식을 하는 생물들의 경우에는 DNA가 복제된 후 몸이 갈라지기만 하면 번식이 이뤄지지만, 유성생식을 하는 생물들은 자신의 DNA의 절반을 운반하는 남자의 정자를 만들고 그들이 서로 만나야 비로서 수정란이 된다. 난자와 정자도 생명은 생명체에서 생명체로 이어진다. 난자와 정자는 연결고리에 불과하다. 생명은 계속 이어지고 있으나 생명체는 잠시 단절된다.

          수정란을 완벽한 생명체로 볼 수없다고 해서 그들을 마구 다뤄도 괜찮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배야 복제 실험을 마친 후 그 배아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결코 가볍게 다룰 수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세계 각처에서 벌어지는 낙태 시술의 현장을 재현해서는 절대 안 된다. 우리 모두 이마를 맞대고 이런 모든 순간에서 절대로 생명의 존엄성이 훼손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다만 생명체의 시작을 논한다는 것이 공헌한 일이며 그 공허하고 모호한 기준에 따라 생명과학자들의 연구 활동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일은 더욱 불합리히다.

          수정란의 생명을 절대로 인정해선 안 된다는 논리도 성립할 수 없다. 지나치게 인간 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자연계를 두루 둘러보면 수정란을 하나의 완벽한 생명체로 보기 어려울 뿐이다. , 인간이 자의식을 얻어야만 비로소 생명체로 인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의식과 자의식 간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인간을 제외한 다른 동물들에게 자의식을 부여하기는 힘들지만 그들에게 의식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억지로 생명체의 시작을 논해야 한다면 유전자가 만들어준 몸이 독립적인 의식을 확보할 때로 보는 것이 수저안으로 보는 것보다 덜 비합리적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복제 인간과 함께 사는 세상

          밤새 눈이 엄청나게 많이 내려 이웃 사람들이 미끄러지기 전에 집 앞을 치워야겠다는 생각에 밖에 나와 보니, 이미 말끔하게 치워져 있었다. 알고 보니 옆집에 새로 이사 온 젊은 부부가 치웠다고 한다. 자기 집 앞도 치우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 요즘 같은 세상에 참 보기 드물게 예의 바른 부부란 생각에 흐뭇했다. 이웃을 잘 만난다는 것만큼 큰 행복도 별로 없지 않은가.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그 부부가 복제 인간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하자. “어쩐지 어딘가 수상쩍다 싶었다니까할 것인가. 아니면 복제되었으면 어때, 사람만 성실하고 좋으면 됐지라고 할 것인가?

          섬뜩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리 먼 훗날의 얘기가 아니다. 지난 세기말 영국의   윌머트(Ian Wilmut) 박사가 복제양을 만든 것을 시작으로 세계는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인간 복제를 향한 발걸음을 재촉해왔다. 우리는 바야흐로 우리 자신을 복제할 수 있는 시대에 살게 되었다. 기술적으로는 더 이상 큰 어려움이 없다, 그래서인지 종교계는 신성(神聖)을 훼손하는 일이라며 엄청나게 술렁이고 있다. 과학이 우리 삶의 질을 향상시킨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적으나, 왠지 점점 더 거대한 공포의 대상으로 우리를 몰아넣고 있다는 느낌 역시 지울 수 없다.

          그러나 과학에 대한 좀 더 명확한 이해가 필요할 것 같다. 사람들은 마치 금방이라도 히틀러나 무솔리니 같은 이들이 여기저기에서 나타나 온 세상을 쑥밭으로 만들기라도 할 것처럼 호들갑이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은 어디까지나 유전자 복제이지 결코 생명체 복제가 아니다. 아무리 칭기즈칸을 복제한다 하더라도 그가 칭기즈칸으로 성장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위대한 정복자가 될 약간의 포악한 성격은 타고날지 모르나, 세상이 완전히 딴판으로 바뀐 현대에 그가 제2의 칭기즈칸이 될 확률은 거의 영에 가깝다. 테레사 수녀를 여럿 복제한다 해도 그들이 모두 남을 위해 평생을 바치지는 않을 것이다.

          복제 인간은 출산 시간이 좀 많이 벌어진 쌍둥이에 불과하다. 나는 쌍둥이로 태어나지 않았지만, 내가 만일 지금 나를 복제한다면 무슨 이유에선지 어머니의 뱃속에서 몇 십년을 더 있다가 쌍둥이 동생이 뒤늦게 태어난 것뿐이다. 몇 초 간격으로 태어난 쌍둥이 형제들도 결코 똑 같은 사람으로 자라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늦둥이 쌍둥이 동생이나와 완벽하게 같을지라도 그 유전자들이 발현되는 환경이 나와 다르기 때문에 전혀 다른 인간으로 성장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에 쌍둥이들이 좀 많아진다는 것이 그렇게도 끔찍한 일인가? 유전자 복제보다 우리가 더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것은 유전자 조작의 문제이다. 복제 인간은 한 두 번 만들어보다 시들해질 가능성이 크지만, 유전자 조작은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마구 뻗어나갈 것이다. 복제양이 만들어진 이후 미국에서는 누구를 복제하고 싶으냐는 여론 조사가 있었다. 마이클 조던과 레이건 대통령을 비롯한 저명인가와 인기인들의 이름들이 거론되었다. 우승을 갈망하는 어는 농구 구단주가 마이클 조던을 복제하여 운동장에 내놓을지는 모르지만, 그런 일이 얼마나 많이 벌어지겠는가? 부족한 노동력을 충당하기 위해서나 세상을 무력으로 정복하려는 계획을 세운다면 모를까 대규모로 복제 인간들을 생산할 이유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유전자 조작의 매력은 복제 인간에 대한 기대에 비할 바가 아니다. 유전자의 기능들이 속속 발겨지고 내가 가진 결함들이 어떤 유전자에 의해 발생하는 것인지를 알게 될 때, 그 유전자를 보다 훌륭한 유전자로 바꾸고 싶은 욕망이 왜 일지 않겠는가, 노화의 비밀이 밝혀져 다만 몇 개의 유전자만 바꾸면 몇 십 년을 더 살 수 있게 된다면 누군들 마다 하겠는가.

          얼마 전 미국에서는 불치의 병을 앓고 있는 첫째 아이에게 골수를 이식해줄 수 있는 사람을 찾다가 실패하자 현대 유전학의 힘을 빌려 계획적으로 건강한 둘째 아이를 임신한 어느 부부의 행동에 대해 뜨거운 논란이 있었다.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옛말처럼 죽어가는 자식을 살리기 위해 과학에 기댔기로 누가 과연 그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단 말인가. 생각하기조차 끔찍한 일이지만 내가 만일 그런 상황에 놓인다면 나는 두 번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영혼은 복제되지 않는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생명체는 누구나 한계성 생명을 지닌다. 최소한 지구에서 사는 생명체는 모두 그렇다. 그래서 종교에서는 대체로 우리의 생명은 한계성을 지니지만, 믿음과 의식을 통해 영원불멸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기독교와 천주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가 우리를 창조하신 영원불멸의 존재를 믿고 그를 거역하여 지은 원죄를 인정하면 내세이 이르러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불교에서는 생명이 한계성을 지니되 그것을 담아줄 그릇, 죽 육체를 바꿔가며 윤회한다고 가르친다. 생명체를 일시적 집합체로 보는 불교의 무아설(無我說)DNA가 하나의 생명체를 만들었다가 해체시키곤 또 만들고 하는 잔화의 기본 원리와 흡사하다. 한계성을 전제로 한 생명의 개념이지만, 영생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생명이 한계성을 지닌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체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의 얘기다. 생명체는 누구나 어김없이 죽을 수 밖에 없지만, 그의 형질들은 유전자를 통해 길이 자손 대대로 전달될 수 있다. 그래서 『이기적인 유전자』(The Selfish Gene)의 저자인 옥스퍼드 대학 진화생물학자 도킨스(Richard Dawkins)는 유전자, DNA불멸의 나선(immortal coil)’에 불과하다고 했다. 하버드 대학 생물학자 윌슨(Edward Wilson)도 이 관계를 낡은 달걀이 더 많은 달걀을 얻기 위해 잠시 만들어낸 매체에 불과하다라고 비유했다. 개체의 관점에서 본 생명은 한계성을 지니지만, 유전자의 눈높이에서 바라본 생명은 영속성을 지닌다.

          DNA의 기본 구조는 현재까지 확인된 모든 생명체에서 동일하다. 다윈이 주장한 대로 오늘날 이처럼 다양한 지구 상의 모든 생물들은 모두 태초에 우연히 생성된 그 어느 성공적인 복제자 하나로부터 분화되어 나왔기 때무이다. 비록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에는 제가끔 보다 효율적인 복제를 위하여 다른 생존 기계들 안에 들어앉아 있지만,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모두 하나의 조상을 모시는 한 집안 식구들이다. 이처럼 생명은 무수히 많은 가지를 뻗었으나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연속성(continuity)을 지닌다.

          지금까지 늘 그래왔듯이 DNA는 어떤 방법으로든 계속 복제의 길을 걸을 것이다. 그러나 영혼은 절대 복제되지 않는다. 자연과학자인 나는 영혼도 결국 물질의 표현일 수밖에 없다고 믿는다. 그러나 같은 DNA를 지녔다고 영혼도 똑같아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한 사람의 영혼이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DNA 위에 세상을 살며 터득한 온갖 지식들이 한데 어울려 엮어진 산물이기 때문이다. 인간 복제가 현실로 우리 앞에 설 것은 기정사실이다. 무지에 바탕을 둔 두려움을 앞세울 것이 아니라 열린 마음으로 대처해야 한다. 복제된 인간과 그렇지 않은 인간들 간의 화합과 평등을 걱정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학제 연구의 필요성

          어떤 형태로든 유전자 조작 기술이 우생학적으로 사용되는 것은 막아야 한다. 아시아가 낳은 가장 위대한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는 싱가포르의 전 수상 리콴유도 한 때 엄청난 실수를 범할 뻔한 일이 있었다. 좁은 나라에서 모두가 자식들을 낳아 기르면 안 된다는 조급한 마음에 지능과 능력이 월등한 사람들만 자식을 가질 수 있게 하자는 법령을 만들려다 국민들의 거센 반발에 서둘러 철회하고 말았다. 조작 기술이 인간을 차별하는 도구로 전락하면 그것이 바로 우리의 존엄성을 해치는 일이다.

          시간문제일 뿐 유전자 조작을 비롯한 인간 복제 전반에 관한 실험이 어떤 형태로든 일어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인위적으로 규제한다고 영원히 막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구더기가 무섭다고 판도라의 상자를 닫아둘 수는 없다. 인간 유전자의 호기심이 절대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막는다고 해서 세계가 함께 참아줄 것도 아니다. 결국은 어느 나라에선가 하게 되고 지나치게 소극적인 정책을 편 우리나라는 그런 나라들로부터 정보를 사들어야 하게 된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되 조심스럽게 열 수 있도록 생명과학자들을 도울 일이다.

          과학자들의 연구는 충분히 보장해야 한다. 구더기가 무서워 장 담그기를 멈출 수는 없다. 다만 그러한 지식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심각하게 논의해야 한다. 과학자라고 해서 책임을 회피할 수는 없다. 현대의 과학자들은 더 이상 노벨이 걸었던 길을 걸을 수 없다. 현대 과학이 자칫하여 저지를 수 있는 사고는 더 이상 다이너마이트에 비할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생명과학의 자기반성과 성찰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과학자들 스스로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가이드라인을 세워야 한다. 다른 모든 일이 다 그렇듯이, 자율 규제가 지나친 외부의 간섭을 막는 제일 좋은 방법이다.

          생명과학 분야의 거의 모든 정보가 미국의 손아귀로 흘러들고 있다. 복제양은 영국이 처음 만들어냈지만 특허권은 미국의 손에 들어가버렸다. 미국은 현재 자체적으로 가장 활발한 연구를 하고 있는 것은 물론 다른 나라에서 개발 된 기술과 지식도 모두 사들이고 있다. 이대로 가면 전세계가 생명과학 지식에 관한 한 미국의 속국이 될 날이 멀지 않았다. 원천적으로 봉쇄할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연구에 참여해야 한다. 생명과학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합당한 윤리 규범을 만들도록 시간을 줘야 한다. 아직 족쇄를 채울 대가 아니다. 인문사회학자들과 생명과학자들의 학제적 공동 연구가 절실하다.

          인간 유전체 연구 결과가 발표되기 얼마 전, 당시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블레어 영국 총리가 공동 기자회견을 갖고 인간 유전체 정보는 세계가 함께 공유해야 한다고 주장하 바 있다. 그렇게 엄청난 예산을 쏟아 부으며 추진해온 사업인데 갑자기 자선 사업을 하겠다니 선뜻 이해가 가지 않은 행동이었다. 그 두 정치인이 그런 주장을 하게 된 배후에는 엄청난 재원을 투자하여 시작한 사업이 자칫하면 일개 유전공학 회사에 뒤지고 말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나라 같은 유전 정보 후진국들은 그들의 발언에 책임을 물을 필요가 있다. 생명과학 정보와 기술은 발전하는 것이지 발명하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과학적 발견에 특허를 준다는 것은 어딘가 모순이 있어 보인다. 나 역시 중미 열대 지방에서 알려지지 않았던 곤충을 찾아내 신종으로 발표한 적이 있지만, 그 종에 대한 특허를 내지는 않았다. 인간은 물론 다른 모든 생명체 안의 유전자에 관한 정보들에 선진국들이 특허를 내며 독점하는 행위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 인문사회과학자들의 도움이 절실하다. 우물 안 개구리들처럼 누구는 뛰려 하고 누구는 발목을 잡으려 할 것이 아니라 함께 가장 실리적이고 합리적인 길을 모색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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