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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성라이온즈, 불과 2015년까지만 하더라도 우승을 다투던 팀이었다. 하지만, 오랜 우승경쟁으로 인한 부작용으로 리빌딩이 더디게 진행되며, 전체적인 선수층의 나이는 높아졌고, 그 와중에 FA로 핵심 선수들이 유출되며 선수층은 얇아지게 되었다. 사실 시즌을 앞두고, 필자의 경우에도 희망찬가를 외쳐보았으나, 핵심 선수 두 명(차우찬, 최형우)의 유출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WAR도 WAR 나름대로 심각한 문제라고 판단할 수 있는 부분이겠지만, 일단 '꾸준하게 버텨줄 선수' 자체가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이 가장 큰 문제인 것으로 보인다. 최근 살아나며 홈런과 타점 상위권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구자욱, 부상만 없다면 골든글러브까지 노려볼만한 조동찬, 오키나와 커쇼에서 진짜 커쇼로 환골탈태한 백정현 정도가 그나마 꾸준하게 버텨주고 있지만, 그 힘으로는 반등이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타 팀에도 그정도 해주는 선수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의미에서 외국인 선수의 존재감이 필수, 필연적이다. 시즌 초반 삼성라이온즈가 양현종, 류제국과 다승왕 선두 다툼(?)을 할 무렵엔 러프의 타격감은 매우 실망스러웠고 (2군행 이전 타율 0.150, 2홈런 5타점), 레나도는 불의의 부상으로 전력에서 이탈한 상태였다. 물론 가격 대비 성적이 압도적이라고 표현할만큼 괜찮았던 페트릭이 그나마 위안거리였으나, 페트릭이 나온 경기 마저도 승리를 쌓기가 쉽지 않았다. (1승 5패) 오죽하면 페크라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사진 스포츠조선, 역투하는 페트릭>


    하지만 5월을 전후해 외국인 선수들이 제 폼을 찾고 제자리로 돌아오면서 삼성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요원할 것만 같았던 3할 승률을 넘어 전반기 내에 4할 승률 진입마저도 가시권으로 보일만큼 삼성의 상승세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최근 18경기 11승 7패, 일요일 경기 패하기 전까지 4연승을 달렸는데, 이는 물론 우규민, 장원삼 선수의 회복, 루키 최충연의 반등 등 다른 원인들도 있겠지만, 러프의 반등, 레나도의 복귀를 빼놓을 수 없다.


     특히나 러프는 2군에서 돌아온 뒤 0.310 7홈런 23타점이라는 훌륭한 기록으로 팀의 살림꾼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나 러프가 돌아온 뒤 1번~ 6번까지의 타순의 짜임새가 훨씬 나아졌다는 평을 많이 듣고 있다. 러프가 든든히 4번을 지켜줌으로 국내타자들의 기록 향상에도 일정 이상 도움을 주는 것으로 보인다. 아직까지 전체 타율은 0.250으로 그렇게 높은 편은 아니지만, 지금 페이스 정도로만 간다면 25~30홈런 80~90타점정도는 거뜬히 해주리라 생각한다. 거짓말 같이 두산 베어스의 에반스 루트를 타고 있는 러프가 꾸준한 활약을 보여준다면 탈꼴지를 넘어선 목표치 달성도 가능하리라 본다. 물론 타격도 그렇고 팀 승운도 사이클을 타기에 항상 이런 상승세로만 있을 수 없겠지만,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지 않을까 조심스레 예측한다.

<홈런임을 직감한 러프, 출처 나무위키>


    레나도의 경우 시범경기에서 무실점 행진을 이어가다 두산 류지혁의 타구에 맞아 강판되었고, 타구를 피하려다 가래톳 부상이 생겨 5월까지 개점휴업 상태였다. 현재 부상 복귀 이후 2경기 모두 3실점 이하 피칭을 보여주긴 했으나, 낮은 구속, 남발하는 볼넷 등, 메이저리그 - 마이너리그에서 보여주었던 볼넷이 적은 닥터 K의 모습은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10 1/3 이닝 9볼넷 5삼진 ERA 3.48) 다음 등판을 기다려봐야 하겠지만, 기본적으로 100만달러 정도의 금액을 주고 데려온 선수인만큼 능력은 있는 선수라고 생각한다. 컨디션이 그다지 좋지 못한 상황에서도 그런대로 꾸역꾸역 잘 막아주는 모습으로 보아 기대가 됨은 분명하다. 최지광이 생각보다 빨리 크지 않는 상황에서 선발진 퍼즐 중 한 조각을 꼭 채워주어야 하는 만큼 빠른 회복세를 기대해본다.

<역투하는 레나도, 출처 OSEN>


    삼성의 현재 승률 3할 4푼. 반등의 실마리인 외국인 선수들의 활약이 어느정도일지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라이온즈에게 10위는 어울리지 않는 옷이다. 팀성적에도 사이클이 있는만큼 다시 침체가 있을 수 있겠지만 점차 더워지며 잘하고 있는 삼성의 성적을 보면 기대가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여름, 삼성의 포효를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기를. 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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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다홍빛하늘입니다:) 최근 제4WBC가 진행되고 있는데요, 우리나라 대표팀의 부진과 태도가 맞물려 그들에 대한 평가나 인지도가 많이 떨어진 상태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상태와 상대편의 상태를 깨닫고, 상대편과의 수준차를 극복하고 실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우연적으로 일어난 일이든, 수많은 노력으로 얻은 일을 계기로 자신만의 무기나 강점을 갈고 닦아야 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오늘은 노쇠화와 역경, 자신의 약점을 딛고 자신만의 주무기와 강점으로 야구인생의 제 2막을 열었던 선수들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 강명구




현재 삼성 전력분석원인 강명구 선수는 선수시절 ‘1툴 플레이어라는 별명이 있었습니다. 타자들에게 필요한 필수 5(타격, 파워, 주루, 수비, 송구) 중 오직 주루 하나만으로 2014년 은퇴할 때 까지 12시즌을 한 팀에서 보냈고, ‘대주자의 전설로 불릴 만큼 유니크한 선수생활을 보냈습니다. 진흥고와 탐라대를 거쳐 삼성 라이온즈에 21순위로 입단한 강명구는 주루실력은 괜찮았지만 타격과 파워는 프로에서 통할 실력이 아니었던 평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입단 3년차인 2005, 그는 44타수 밖에 나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109경기 21도루로 대주자 스페셜리스트의 생활을 시작합니다(타율도 .250으로 나쁘지 않았습니다). 이를 시작으로 2006년 시즌 1안타에도 불구하고 대주자로서 21개의 루를 훔쳤고, 2011년 시즌에서도 19도루를 기록함과 동시에 427일 홍상삼을 상대로 생애 첫 홈런을 쳐 KBO 시즌 공식 최고령 데뷔 홈런이라는 이색 기록도 세웁니다. 하지만 2014시즌 스프링캠프에서 공에 머리를 맞는 부상 등 여러 부상과 동시에 박찬도 등 젊은 선수들이 1군 엔트리를 채우자, 시즌 종료 후 방출되고 전력분석원이 됩니다. 비록 발 말고는 별 메리트가 없는 선수였고(2009년 상무 시절 북부리그 타격왕도 얻은 적이 있습니다), 당시 주전과 후보의 차가 작지 않았던 팀에서 엔트리를 채우기 위해 들어왔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바로 그가 있었기에 삼성 라이온즈는 2013KBO리그 첫 통합 3연패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최고의 명장면>

SK 와이번즈와의 2012년 한국시리즈 1차전, 1점차로 아슬아슬하게 리드하고 있던 상황에서 2루에 대주자로 출전한 강명구. 다음 타자였던 배영섭이 친 타구는 중간을 빠져나올 듯 보였습니다만 2루수의 글러브에 잡혀 내아안타가 됩니다. 하지만 강명구는 3루에서 멈추지 않고 바로 홈으로 달렸고, 공은 3루수를 거쳐 포수까지 갔지만 결국 득점합니다. 쐐기점이 된 이 점수로 선발투수 윤희상은 완투패를 당했고, 삼성은 SK42패로 꺾고 2012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합니다.



 

2. 장호연




OB 베어스에서 유일하게 한 팀에서 100승 이상을 올린 장호연 선수는 데뷔 첫 경기에서 완봉승을 거두었지만 시즌 617패로 다패왕에 오르는 등 초반에는 순탄치 않은 시즌을 보냈습니다. 그의 직구 구속은 130km 초중반에 머물렀고, 그렇다고 제구가 좋은 투수도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가 선택한 것은 공의 변화 정도와 방향을 극대화하는 것이었습니다. ‘한 경기에 같은 구종을 두 개 이상 던지지 않는다라고 했었고, 12가지 공을 던진다는 말도 있었을 정도로 다양한 구종을 던졌습니다. 그는 체인지업, 슬러브 등의 구종을 주로 던졌고 그의 주무기인 싱커로 맞춰잡는 투구를 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일찌감치 자기관리의 주요성을 깨닫고 겨울마다 꾸준히 하체를 단련했습니다. 효과는 엄청났습니다. 데뷔 2년차 1.58로 방어율왕에 오른 후 1993년까지 99이닝에 그쳤던 1991년을 제외하면 꾸준히 100이닝 이상을 던졌고, 통산 79완투로 역대 3위에 오를 정도로 완투형 선발투수의 모든 것을 보여줬습니다. 만약 그가 150km가 넘는 구속과 어마어마한 구위가 있었다면 그의 통산 승수인 109승은 넘었을 지도 모르지만, 79완투는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의 투구스타일은 선수생활의 롱런과 팀의 불필요한 투수진 낭비를 막는 역대급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최고의 명장면>

그는 무려 9번 개막전에 선발등판하여 개막전의 사나이라고 불렸는데, 그 중 가장 압권은 1988년 개막전일 것입니다. 원래 선발투수는 김진욱(KT 위즈 감독)이었으나 연습타구에 고간을 가격당해 땜빵으로 개막전 선발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몸이 완전히 풀리지 않았던 그는 최대한 맞춰잡는 피칭을 했고, 결국 볼넷 1개와 몸에 맞는 볼 2개를 제외하고 모든 타자를 출루시키지 않으며 노히트노런을 달성했습니다. 그의 노히트노런에는 조금 특별한 것이 있었는데, 삼진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 투구수 99개로 두 자리수 투구로 노히트노런을 만들어 낸 것이었습니다(전 세계로 확대해봐도 이러한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고 할 수 있습니다).

 



3. 송진우




송진우 선수는 KBO 투수 통산기록을 거의 독식하고 있을 정도로 오래, 그리고 꾸준히 선수생활을 했습니다(최다승, 최다이닝, 최다삼진 등...). 그도 앞에 설명했던 장호연 선수처럼 데뷔 첫 경기를 완봉하였고 99세이브로 준수한 활약을 보여 준 후 다음 해에도 1127세이브로 2년차 징크스를 극복하며 빙그레의 에이스로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구대성이 등장하기 전까지 선발, 중계, 마무리 등 확정된 보직이 없이 계속 던졌고, 결국 구위 저하와 구속 저하로 1997년 승수가 15승에서 6승으로 떨어집니다. 다음 시즌도 6승으로 부진하자 결국 구단은 그를 애리조나 교육리그로 보냈고, 거기에서 송진우 선수는 선수인생 2막을 열 구질을 배웁니다. 바로 서클체인지업입니다. 그는 메이저리그 중계를 보던 중 제이미 모이어를 보게 되었는데, 송진우 선수는 자신보다 3살이나 어리고 140km도 안 되는 직구를 던지는데도 불구하고 선발투수로 활약하고 있는 이유를 유심히 관찰하여 이가 서클체인지업 때문인 것을 알게 되었고, 교육리그에서 그립을 배우고 열심히 연습하여 다음 시즌인 199915승을 기록하여 기교파 투수로의 성공을 알리고 팀의 한국시리즈 우승에도 기여합니다. 이후에도 그는 200218승으로 199219승에 못지 않은 성적을 올렸고, 꾸준히 3점대 이내의 방어율과 준수한 이닝소화능력으로 최고령 완봉승, 2006829KBO 최초 20, 2008493000이닝, 2008662000탈삼진 등 200944세로 은퇴하기까지 각종 기록을 세웠습니다. 특히 은퇴하기 전 시즌에도 132이닝을 넘게 소화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최고의 명장면>

그의 선수시절 중 가장 최고였던 순간을 꼽자면 아직까지 누구도 달성하지 못한 200승 경기를 꼽고 싶습니다. 2005시즌 730199승을 거둔 후 부담감과 불운이 겹쳐 200승 도전이 연거푸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829, KIA와의 경기에서 타자들을 5이닝 5피안타 2볼넷 4삼진 1실점으로 막아 10-1200번째 승리를 이뤄냈습니다. 45기 끝에 이루어낸 성과라 더욱 기뻐했고 팀과 팬들 모두 그의 승리를 축하했습니다. 하지만 tv로는 이를 축하하지 못했는데, 그 때 당시 KBO 리그의 인기가 잠시 주춤했던 시기이도 했고 라이언킹이승엽이 일본에 진출하여 본격적으로 활약하기 시작하면서 SBS 스포츠 채널에서 NPB 경기를 중계하고 송진우 경기를 녹화중계하는 결정을 했기 때문입니다.

 



인생에 굴곡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좌절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이를 극복하고 인생의 제 2막을 여는 사람들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스포츠도 그렇습니다. 힘찬 20대를 지나고 30대가 되어 일어난 노쇠화로 또 다른 20대에 밀릴 위기에 놓이면 선택은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팀이 나타날 때 까지 팀을 떠돌아 다니거나, 20대 선수들을 압도할 수 있는 무기를 갈고닦아 계속 팀의 주축으로 남는 선택입니다. 비록 그들은 남들보다 특별하지 않았던 적이 있었지만, 자신만의 강점을 극대화하거나(강명구), 노력으로 향상시킬 수 있는 변화구를 연구하거나(장호연), 아예 투구 스타일을 바꾸면서(송진우) 선수생활을 연장했습니다. 우리도 이들처럼 자신의 역경을 이기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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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다홍빛하늘입니다:) 최근 2017년 제4WBC 개최를 앞두고 우리나라 대표팀이 승리를 위해 힘찬 걸음을 내딛고 있는데요, 일본 프로팀과의 평가전에서의 패배를 발판삼아 최근 쿠바와의 평가전 2차례를 모두 승리하면서 관심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나라 프로야구의 시작과 초창기 프로야구의 인기를 끈 라이벌에 대해서 글을 써볼까 합니다.

 

1982327, 서울 동대문야구장에서 프로야구 첫 시즌의 첫 경기가 개최됩니다. 대구경북을 연고지로 하는 삼성 라이온즈와 당시 대전을 연고지로 했던 OB 베어스 간의 경기였습니다. 경기 후 포커스는 10회말 끝내기 만루홈런을 쳐낸 이종도에 쏠려 있었지만, 그 경기에서 첫 안타, 첫 홈런, 첫 타점을 기록하여 프로야구의 첫 기록을 세운 선수도 있었습니다. 바로 '헐크' 이만수였습니다. 그는 초창기 삼성 라이온즈의 안방마님을 도맡았고, 홈런을 치면 펄쩍 뛰고 함성을 지르는 투지있는 플레이(그 덕분에 적지 않은 118개의 사구를 얻기도 했습니다)로 인기를 얻었습니다.

 이만수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1982년 시즌이 OB 베어스의 우승으로 끝난 후, 여러 가지 진기록들이 주목을 받았습니다. 백인천(MBC)의 타율 .412, 박철순(OB)22연승이라는 기록들이 세워졌지만, 투타 겸업을 하며 3할 타율, 두자리수 홈런, 10승을 기록한 다재다능한 선수도 그 명단에 올랐습니다. ‘오리궁뎅이김성한이 그 주인공이었습니다. 개막 당시 6팀 중 가장 적은 17명의 선수로 시작했기 때문에 투수와 타자가 모두 부족할 수 밖 에 없었고, 결국 타자로 나오지 않았을 때에는 투수로 마운드에 서야 했습니다. 그는 1982년부터 2004년까지 선수, 코치, 감독 시절을 모두 해태-KIA에서 보낸 프랜차이즈 맨이었습니다.

 김성한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학교에 늦게 입학했고, 중학교 2학년 때 야구를 시작했지만 군산상고 시절 팀의 타선을 이끌었고, 1979년 실업야구 한국화장품에 입단하여 3연타석 홈런 3회를 포함 3년동안 대통령배 실업야구 3시즌 연속 홈런왕으로 군림한 선수가 있습니다. 1982년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 시 31세로 적지 않은 나이였지만, 그는 22개로 초대 홈런왕에 오르면서 클라스는 여전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바로 미스터 콧수염김봉연입니다.

 김봉연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바로 앞에서 설명했듯이, 1982년 시즌까지는 홈런하면 김봉연 이었습니다. 김성한의 홈런 수는 13개로 불과했지만, 100이닝을 넘게 던지며 10, 방어율 2.88로 투수로서도 정상급 실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만수는 타율과 타점에서 김성한보다 저조한 성적을 기록했지만 KBO리그에 완전히 적응했고, 결국 1983년과 84년 연속 홈런왕이 됨과 동시에 1984.340, 23홈런, 80타점으로 트리플크라운을 달성합니다. 김봉연은 1983년 교통사고로 인한 휴유증이 생겼고, 김성한은 투수의 짐을 내려놓기 시작하면서 이때부터 김성한과 이만수 사이에 라이벌 구도가 형성되게 됩니다.


이만수의 활약에 자극을 받은 것처럼, 82년과 84년 각각 13, 12개로 불과했던 홈런수가 85년 개로 훌쩍 뛰면서 같은 시즌 22개의 홈런을 친 이만수와 함께 공동홈런왕에 오릅니다. 다음 해인 1986년에는 18개의 홈런을 친 김성한이 2개 차로 이만수를 앞섰지만, 같은 팀 타자였던 김봉연이 22개의 홈런을 쳐내며 홈런왕을 차지했고, 이만수는 김봉연과의 경쟁 끝에 KBO 리그 최초로 100홈런을 달성합니다.(이후 김봉연은 1987년 홈런수가 6개로 급감했고, 1988년 시즌 후 은퇴합니다. 아무래도 적지 않은 나이가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1987년 삼성의 거구 2루수 김성래에게 홈런왕 자리를 잠시 빼앗겼지만, 1988년 김성한이 30개의 홈런으로 KBO리그 최초 30홈런을 달성했고, 1989년에도 26개로 홈런왕이 됨과 동시에 30개의 도루로 KBO 최초 20-20 클럽 가입, KBO 최초 시즌 30홈런, 시즌 30도루를 달성한 최초의 선수가 됩니다. 이만수도 분전했지만 장채근, 유승안에 밀려 3위를 기록했습니다.

 

1990, 빙그레 다이너마이트 타선의 핵인 장종훈 선수가 떠오르기 시작하며 그들은 홈런왕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됩니다. 그들도 꾸준히 두자리수 홈런을 쳤고, 김성한은 199123, 이만수는 199222개 등 20홈런 이상을 기록하기도 했지만 노쇠화에 의해 파워와 스피드가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만수는 지명타자로 선수생활을 이어갔지만 1995년 신인왕을 차지한 이동수에게 밀려 1997년 시즌 이후 구단과의 불화 끝에 쓸쓸히 은퇴했고, 김성한도 1994년 자신의 주 포지션인 1루수에서 밀려나 플레잉코치로 전락하여 1995년 시즌 이후 은퇴를 선언합니다.

 

현재 홈런이라면 이승엽, 박병호 등의 이름을 떠올리지만 초창기 프로야구의 강타자는 김봉연, 김성한, 이만수였습니다. 그들은 초창기 프로야구의 인기를 이끌었고, 팬을 몰고 다녔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야구의 재미를 깨우치게 해주었던 선수들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이름과 프로야구에게 제공했던 공로를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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